[시론] 일, 그리고 가정

입력 2024-10-27 17:41
수정 2024-10-28 00:15
첫 아이 출산휴가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같이 일하는 남성 선배를 찾아갔을 때 들은 한마디를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여자들은 석 달이나 쉬니 좋겠다. 나도 월급 받아 가며 좀 쉬어 봤으면 좋겠다.”

선배의 단순한 농담일 수도 있고, 연일 격무에 시달리는 직장인의 자조적인 한탄일 수도 있겠지만, 적잖게 충격이었고 괜히 눈치가 보였다. 출산과 육아라는 또 다른 격무에 시달릴 것이 예상되는 출산휴가를 두고, 그 선배는 ‘3개월간 팔자 좋게 회삿돈으로 쉬다 오는 시간’으로 여기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 법률에는 근로자의 임신 전후, 출산 후, 육아기 등 각 시기에 따라 모성 보호 및 근로자의 양육에 관해 다양한 제도를 두고 있다. 이달 22일자로 개정돼 내년 시행을 앞둔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 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도 자녀를 두고 있거나 계획하는 근로자라면 귀가 솔깃해질 만한 개정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우선 출산휴가는 현재 단태아 기준 90일이 원칙이지만, 미숙아를 출산한 근로자는 향후 100일까지 사용할 수 있다. 최대 1년인 현행 육아휴직은 한부모 가정 등 특별히 육아의 필요성이 더 인정되면 최대 1년6개월까지 사용이 가능해진다. 배우자 출산휴가는 유급 10일에서 유급 20일로 늘어난다. 부모도 자녀도 가장 적응이 힘든 신생아의 처음을 부부가 금전적 부담 없이 함께 보살필 수 있다.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대상은 현행 만 8세 이하 자녀가 있는 경우에서 만 12세. 그러니까 자녀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확대된다. 근로자들이 일 때문에 출산과 육아를 망설이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다양한 시도와 제도 개선이 계속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혼인과 출산이라는 순전히 개인의 선택에 따른 사정을 왜 국가가, 특히 사적 근로계약의 상대방일 뿐인 사용자가 시간과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대법원에서는 그 해답을 자녀 양육권의 ‘사회권적 기본권’에서 찾고 있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남녀고용평등법은 자녀 양육권의 사회권적 기본권을 법률로 구체화한 것이고 근로자의 양육을 배려하기 위해 국가와 사업주의 일·가정 양립 지원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로자가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은 헌법에서 보장한 근로자의 사회권적 기본권 행사이고, 사업주가 이를 지원해야 하는 것은 단순한 ‘은혜적 배려’가 아니라 ‘법률상 의무’라는 얘기다.

다만 이 같은 모성 보호 및 일·가정 양립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고려할 사항도 있다. 모성보호 제도로 인한 급여 부담을 사업주에게만 지우면 여성 또는 자녀 계획을 가진 근로자의 채용을 기피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모성보호 휴가를 사용하는 근로자를 둔 사용자의 금전적 부담을 줄일 수 있게 제도를 보완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출산 근로자의 휴직과 휴가로 어쩔 수 없이 업무량이 증가하는 부서 내 다른 근로자에게 수당을 지원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다.

출산휴가는 근로자들이 ‘팔자 좋게’ 쉬다 오는 시간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근로자가 사업주나 다른 동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도모하기 위해 근로자에게 최소한으로 필요한 제도라는 사회 전반의 인식 제고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