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분쟁 격화에도…원유 가격은 왜 떨어질까 [양병훈의 해외주식 꿀팁]

입력 2024-10-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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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반(反)이스라엘 연대 간의 분쟁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최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하마스의 최고 지도자 야히아 신와르를 제거했고, 이란은 이에 대해 “저항정신이 거세질 것”이라며 강경 대응 의지를 내보였습니다. 이란은 하마스, 헤즈볼라 등 반미국·이스라엘 연대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하마스 간 휴전 협상이 재개됐다는 소식도 나오고 있지만, 그렇다고 험악한 분위기가 가라앉은 건 아닙니다.

중동에서 분쟁이 확산하면 원유 공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이에 따라 원유 선물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게 일반적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세계은행은 국제유가가 배럴당 150달러대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전망을 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후 1년 동안 중동 분쟁은 점점 더 격화됐지만, 원유 가격은 오히려 떨어졌거든요. 이유가 뭘까요.


일단 데이터를 자세히 보겠습니다.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은 지난해 10월 85.29달러(매 거래일 종가의 평균)를 기록했습니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사실이 알려진 뒤 첫 거래일인 2023년 10월 9일에는 하루 만에 가격이 4.34% 급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상승세는 금방 힘을 잃었습니다. WTI 유가는 당월 19일 88.37달러를 고점으로 지금까지 줄곧 우하향했습니다. 이달 1~24일 종가 평균 가격은 72.21달러에 그쳤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가가 오를 것이라는 말을 믿고 투자했던 국내 개인 투자자들은 잔뜩 물려 있는 상황입니다. 네이버증권에 따르면 원유 선물 가격을 추종하는 국내 파생상품 중 가장 시가총액이 큰 '삼성 레버리지 WTI원유 선물 상장지수증권(ETN)' 투자자들의 이 종목 수익률은 25일(한국시간) 현재 약 -29%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근 유가가 맥을 못 추는 건 중국의 경기 부진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입니다. 닛케이아시아는 최근 '중동 사태가 유발한 쇼트 커버링으로 원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할 수 있다' 보도에서 "지정학적 충돌이 없다면 중국과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경제성장률이 둔화하면서 내년까지 원유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할 것"이라고 관측했습니다. 에릭 놀랜드 CME그룹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원유 가격은 지난 20년 동안 약 1년의 시차를 두고 중국 경제성장률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놀랜드 이코노미스트의 말대로 중국 경제 성장률과 WTI 유가의 흐름은 어느 정도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중국 경제성장률은 2007년 14.19%로 정점을 찍었고, 그 이듬해 7월 WTI 유가는 배럴당 145.29달러까지 올랐습니다. 2000년대 최고가였습니다. 2008년 중국 경제성장률이 9.62%로 떨어지자 WTI 유가는 2009년 3월 40달러대까지 떨어졌습니다. 2015~2019년 중국 경제 성장률이 6%대를 유지하자 WTI 유가도 50달러 인근에서 머물렀습니다. 중국 경제성장률이 2021년 8.4%로 반등했을 때는 WTI 가격도 잠깐 100달러 위로 올라왔고요.


그렇다면 앞으로의 유가 흐름은 어떨까요? 단기적으로는 중동 분쟁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분쟁이 격화돼 이란의 원유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순식간에 가격이 튀어 오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계속 우하향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중국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5.2%에서 2026년 4%대 중반까지 지속해서 내려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내연기관차가 점점 전기자동차로 교체되고 있는 것도 유가 하락 전망에 힘을 싣고 있습니다. 블룸버그는 지난 8월 '중국에서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의 판매량이 처음으로 전체 자동차 판매량의 50%를 돌파했다' 보도에서 "전기차 산업은 글로벌 수요 둔화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여전히 강력한 모멘텀을 보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란이 유가를 폭등시킬 정도로 분쟁을 키울 가능성은 작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분쟁 확대를 꺼리는 미국의 우방국입니다. 이란은 미국과 대립하지만 지금까지 미국의 '레드라인'은 넘지 않는 행태를 보여왔습니다. 미국이 2020년 1월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암살했을 때 이란이 했던 '보복'이 그 사례입니다. 당시 이란은 미국에 사전 통보를 한 뒤 미국 공군기지의 공터로 미사일을 쏘는 정도로 일을 마무리했습니다. 국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뭐라도 하기는 해야 하는데, 정말로 공격했다가는 큰일 날 테니 이 정도만 한 거죠.

최근까지도 이런 모습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24일 '이란은 이스라엘과 전쟁 중이지만 이를 피하기를 바란다' 기사에서 "이란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심각한 공격을 하는지를 감안해 대응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며 "미시일과 드론을 보관하는 군사 기지, 창고를 공격하는 데서 그친다면 이란은 아무 대응도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이란 공무원 4명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