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문해력과 시장경제

입력 2024-10-20 18:28
수정 2024-10-21 00:20
문해력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주요 논란거리가 됐다. 다른 사람의 말을 엉뚱하게 이해한다거나, 학생들이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 수업 진행이 어렵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각종 SNS와 언론에 소개되고, 여러 의견이 펼쳐졌다. 많은 사람이 학교에서 관련 수업을 강화하고 한자 교육을 확대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최근 한글날을 맞아 교사를 대상으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주목받았다.

우리 국민의 어휘력과 문해력이 저하되고 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자기 생각을 말하고 상대방이 그것을 알아듣는 것 그리고 문자로 된 정보를 제대로 생성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모든 경제활동의 기초이자 민주사회의 토대다. 이런 능력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은 경제가 성장하고 정치가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이 소멸되고 사회가 퇴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개선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다.

그런데 문해력에 대한 최근 논란과 관련해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객관적 측정의 부재다. 우리나라 사람들 또는 학생들의 문해력이 예전보다 낮아졌다는 주장은 대부분 사흘을 ‘4일’로 착각한다거나 ‘심심한 사과’라는 말에 대해 ‘사과가 어떻게 심심하냐’는 반응을 들었다는 등 그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이 겪은 당황스러운 경험에 근거한다.

하지만 문해력이 무엇인지, 국민이 꼭 알아야 할 낱말은 무엇인데 그것을 이해하는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를 체계적으로 측정하는 작업은 하지 않은 채, 몇몇 눈에 띄는 사례를 토대로 문해력 저하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문해력 논란이 제기된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현황 파악을 위한 노력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정부의 무책임과 나태함이 문해력 저하 자체보다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둘째는 문해력과 관련한 논의가 대부분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을 타박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현상이다. 즉 어떤 사람이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낱말이나 문장을 구사하는 것에 불평을 제기하는 것보다 내가 한 말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방향의 논의는 경제학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장면을 살펴보자. 상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손님에게 상품을 설명한다. 손님이 어리거나 학력이 낮으면 거기에 맞춰 가장 쉬운 표현을 사용할 것이고, 외국인이라 우리말을 못 알아들으면 손짓·발짓까지 동원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어를 공부하기까지 한다. 물건을 사지 않은 채 돌아나간 뒤에는 모르지만, 적어도 손님이 상점 안에 있는 한 왜 내 말을 못 알아듣느냐고 타박하는 일은 드물다. 설사 그런 사례가 있더라도 그런 상인은 물건을 잘 팔 수 없을 테니 살아남기 어렵다. 결국 시장에서 의사소통이 안 될 때 그 책임은 대부분 정보를 전달하려는 사람이 지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처럼 시장을 기준으로 보면 문해력 논란은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학부모에게 보내는 알림장에 ‘점심 식사’나 ‘오늘’ 대신 ‘중식’이나 ‘금일’ 같은 단어를 쓴 탓에 혼란이 생겼다고 해보자. 만일 이런 일이 학원에서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학원에서는 학부모의 문해력을 탓하는 대신 혼란이 없는 용어로 메시지를 고쳐서 발송하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신경 쓸 것이다. 반면 입으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외치는 군대, 법원, 정부 부처 사람일수록 일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듣는 사람에 대해 배려하지 않아도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은 의사 전달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람을 탓하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상대방이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낱말과 문장을 사용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정보의 수요자가 아니라 공급자가 정보 전달에 대해 기본적인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문해력 논란에 대한 시장적 또는 경제학적 진단과 처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