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들이 대놓고 국세청의 세무조사에 응하지 않는 것은 과태료 수천만원만 내면 수백억, 수천억원의 법인세를 피할 수 있는 구조 때문이다. 국내에서 번 돈을 모두 ‘로열티’ 등으로 해외 본사에 송금한 뒤 “자료가 없다”고 버텨도 처벌(과태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 이후 국세청이 이익 규모를 추산해 세금을 부과하면 대형 로펌을 통해 조세행정소송을 걸고, 유리한 자료만 제시해 승소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매년 수조원을 벌어들이는 빅테크들이 쥐꼬리 법인세를 내는 배경이다.
“매출 수조원도 과태료는 동일”연매출이 수조원에 달하는 글로벌 플랫폼기업 A사는 국내 서비스 판매수입 대부분을 로열티 명목으로 해외 본사에 송금하는 방식으로 이익 규모를 조정했다. 납부한 법인세는 국내 매출의 1%에도 미치지 않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A사는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시작되자 “서비스 제공자는 해외 본사이며 한국지사는 중간 유통업자로서 재판매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국세청이 해외 본사와의 저작권·사용권에 대한 계약서 등 자료 제출을 요구했지만 자료가 국내에 없다는 이유로 제출을 거부했다.
국세청은 수십억원의 과태료를 부과했지만, 최종적으로 2000만원으로 조정됐다. 한 건의 세무조사에는 한 건의 과태료 부과만 인정한다는 2021년 법원 판례 때문이다.
글로벌 정보기술(IT)기업 B사의 한국법인도 6개월 동안 국세청 자료 요청을 거부했다. 수십 차례 회사로 찾아갔으나 면담을 거부했고, 해외 본사와의 화상 회의 제안도 피했다. 그러나 이 역시 과태료는 수천만원 수준이었다.
이후 조세불복 단계에서 부과된 세금을 취소받은 사례도 많았다.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인 송언석 국민의힘 의원이 국세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외국인(외국인이 대표로 있는 법인 포함)에 대한 국세청의 조세행정소송 패소율은 지난해 기준 19%였다. 전체 소송 평균(9%)의 두 배가 넘는다. 특히 외국인이 6대 대형 로펌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경우 액수 기준 국세청 패소율은 79.3%를 기록했다.
현행법상 납세자가 과세 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과세관청은 추계 과세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처분에 불복한 뒤 향후 유리한 자료를 골라 제출하면 과세 처분이 취소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설명이다. 외국계 기업들이 “자료가 해외에 있다”며 버티다가 소송전에 들어가는 이유다.
그사이 글로벌 업체의 법인세 기피는 더 고착화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넷플릭스의 한국법인 넷플릭스코리아는 지난해 국내에서 7733억원의 매출을 올리고도 법인세는 107억원만 냈다. 같은 해 3449억원의 국내 매출을 낸 구글코리아 역시 법인세 납부는 170억원에 그쳤다. 이인선 국민의힘 의원은 구글코리아의 실제 매출은 연 12조원 이상인 것으로 추산했다. 국내 앱마켓 매출 등을 싱가포르법인에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매출을 줄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꼼수 자료 회피 처벌 강화해야”선진국은 기업의 과세 자료 제출 불응에 각종 규제 장치를 마련해 엄정히 대응하고 있다. 미국은 세무조사에 필요한 자료 제출을 이행하지 않으면 사실상 세무시효가 중단된다. 조사 단계에서 내지 않은 과세 자료를 조세 불복 이후 증거로 제출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영국은 과세당국 자료 제출 통지에 불응하면 형사 처벌까지 가능하고, 독일은 불응 정도에 따라 제재 수위를 높이는 ‘비례적 제재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여당은 악의적인 조세 회피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법안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송 의원은 국세청 자료 제출 거부 시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은 국세기본법 발의를 준비 중이다. 이 법안은 다음달 이후 국회 기재위에서 논의될 전망이다. 송 의원은 “일부 외국계 기업의 자료 제출 기피 행태는 조세 정의를 훼손하고 국부를 유출하는 행위”라며 “시행령을 통해 매출 규모에 따라 과태료 구간을 세분화하는 등 엄정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