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다시 주목받는 경영권 '방어 수단'

입력 2024-10-14 17:44
수정 2024-10-15 00:12
MBK파트너스가 설립한 특수목적회사인 한국기업투자홀딩스(MBK)와 영풍이 9월 13일 제출한 고려아연 주식 공개매수신고서를 보면 영풍이 1만 주를 매수할 뿐, MBK가 대부분을 인수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 건은 MBK가 중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액주주들은 환호한다. 비자발적 장기투자 상태에서 탈출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기 때문이다. 반면 경제계는 막대한 자금을 앞세운 국내외 어떤 세력이 기업을 공격할 때 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고, 정부와 법원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주목하고 있다. 남의 일 같지 않아서다.

경영권 공격에 대한 강력한 방어 수단은 공격자를 차별대우하는 것이다. 흔히 ‘포이즌 필’이라고 한다. 포이즌 필 활용 사례를 살펴본다.

1985년 미국 유노칼 판결을 보자. 메사석유회사가 유노칼 주식에 대해 ‘2단계 공개매수’를 선언했다. 1단계는 주당 54달러에 매수하는 것이고, 매수에 응하지 않은 주주에게는 2단계에서 주당 54달러 가치의 ‘정크본드’나 다름없는 증권과 교환해준다는 내용이다. 1단계에서 주주들이 주식을 메사에 던질 것을 노린 것이다. 유노칼 이사회는 ‘메사를 제외한’ 전 주주를 상대로 주당 72달러에 상당하는 선순위 채권을 발행해 제공하기로 하는 대응 공개매수를 의결했다. 메사는 자신을 제외한 것이 부당하다며, 유노칼의 대응 공개매수 금지를 구하는 소를 제기했다. 델라웨어주 대법원은 공격자의 위협에 대항한 유노칼 이사회의 평가가 합리적인가, 방어적 조치가 비례성 기준에 적합한가를 기준으로 유노칼의 방어 조치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그 후 많은 판결이 이 판결을 따르고 있다.

일본 판결도 있다. 미국계 펀드인 스틸파트너스가 불독소스의 주식을 사 모으기 시작함에 따라 불독소스 이사회는 ‘스틸파트너스를 제외한’ 주주 전원에게 ‘취득조항부 신주예약권’(일정한 사유가 발생하면 회사가 주주의 동의 없이 취득하기로 하는 조건이 붙은 신주예약권)을 무상으로 배정했다. 주당 3개의 신주예약권을 배정해 의결권을 4분의 1로 희석하는 내용이었다. 스틸파트너스에는 대신 현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스틸파트너스는 이런 차별대우는 주주 평등원칙 위반이라며 법원에 신주예약권 배정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2007년 8월 9일 이 가처분 신청을 최종 기각했다.

한국에선 포이즌 필이 인정되지 않는다. 차등의결권 주식도 인정되지 않는다. 현재 허용된 유일한 경영권 방어 수단은 ‘자사주’ 활용이다. 고려아연도 자사주 취득과 소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자본시장법 시행령을 고쳐 자사주 취득과 처분마저 강력히 제한하려고 한다. 이미 입법예고를 마쳤다. 시행령 개정안은 합병·인적 분할 때 자사주에 신주 배정을 금지하고, 자사주를 5% 이상 보유하면 추가 취득·처분·소각 계획에 대한 이사회 결의 및 정기보고서 공시 요구로 자사주 소각과 처분을 간접적으로 강제하겠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상법 개정안은 자사주 처분 때 신주 발행처럼 주주의 지분 비율에 따라 처분하도록 한다. 자사주에 대한 이런 조치들은 마지막 남은 경영권 방어 수단마저 뺏는 것이다. 경영권 방어에 자사주를 활용할 수 없게 하려면 포이즌 필과 차등의결권 주식을 먼저 도입해야 한다.

이번 고려아연 사태가 장기화하면 세 당사자가 모두 피폐해짐은 물론 소액주주들도 피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 이젠 멈추고 합의를 이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