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분간 임원보고' 받는 정의선…'파괴적 혁신' 이끈 송곳질문

입력 2024-10-13 17:57
수정 2024-10-21 16:29

자동차는 수많은 제조업에서도 가장 경쟁이 치열한 분야로 꼽힌다. 역사가 100년이 넘다보니 미국, 유럽, 일본 등 지역마다 ‘전통의 강자’가 즐비한 데다 전기차란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미국 테슬라, 중국 비야디(BYD) 같은 신흥 강자들도 경쟁 대열에 합류하고 있어서다. 그러다보니 ‘유럽의 맹주’ 폭스바겐과 미국 빅3인 제너럴모터스(GM), 포드, 스텔란티스 등 전통의 강호들도 뒷걸음치고 있다.

정의선 회장이 이끄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약진이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20년 10월 정 회장 취임 후 현대차그룹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몇몇 수치만 봐도 알 수 있다. 2019년 279조원이던 그룹 매출(연결대상 제외한 29개사 기준)은 올해 45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2019년 9조원 정도이던 순이익은 지난해 27조원을 웃돌았다. 2019년 3.5%이던 현대차와 기아의 합산 영업이익률은 올 상반기 10.7%로 뛰었다. 빅5 중 가장 높은 수치다. 글로벌 판매 순위는 5위에서 3위가 됐다. 자동차 판매량은 2019년 719만 대에서 올해 740만 대로 성장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이는 자동차 시장에서 두 자릿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는 건 차원이 다른 경쟁력을 갖췄다는 의미”라며 “정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을 빼고 현대차그룹의 약진은 설명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경청의 리더십…수익성 개선에 집중업계에선 정 회장 리더십의 핵심으로 ‘빠른 판단’을 꼽는다. 미심쩍은 게 없을 때까지 임직원들에게 송곳처럼 묻는 치열함과 그에 대한 해법을 여러 경로로 듣는 경청이 낳은 결과다. 정 회장은 수시로 주요 임원들로부터 1 대 1 보고를 받는데, 보통 한 시간을 넘어 두 시간에 이른다고 한다. 현대차그룹에서 정 회장 보고를 ‘100분 토론’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현대차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정 회장은 사소한 사안이라도 이해가 안 되면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고 말했다.

정 회장이 양적 성장보다 질적 성장에 매달리는 것도 수없이 질문하고 해법을 들은 뒤 판단한 결과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로 승부해선 중국 차를 이길 수 없다고 보고 프리미엄 브랜드로 현대차와 기아의 포지셔닝을 올려야 한다고 판단한 것. 그러기 위해 정 회장은 품질을 끌어올리고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이 덕분에 현대차·기아는 할인 없는 브랜드가 됐고 제네시스는 미국에서 메르세데스벤츠, BMW와 맞먹는 프리미엄 브랜드 대접을 받게 됐다.

‘곳간이 풍성해야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는 정 회장의 판단은 수익성이 높은 레저용 차량(RV)과 하이브리드카 중심의 라인업 재편으로 이어졌다. 현대차는 올 상반기 기준 RV·제네시스 비중이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현대차그룹이 돈 되는 차를 많이 팔 수 있었던 건 전기차·하이브리드카·수소전기차 등 포트폴리오를 갖춘 뒤 수요에 따라 생산량을 늘렸기 때문이다.

상품성도 개선했다. 최근 10년간 ‘북미 올해의 차’ ‘유럽 올해의 차’ ‘세계 올해의 차’ 등을 포함해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높은 6개 올해의 차 시상식에서 현대차·기아는 총 66개 상을 받으며 2위인 폭스바겐을 크게 앞질렀다. 4년간 이익을 계속 쌓으면서 내실도 크게 개선됐다. 현대차의 현금성 자산은 2019년 8조6819억원에서 올 상반기 기준 18조1455억원으로 10조원 가까이 늘었고, 기아의 부채비율은 같은 기간 91%에서 69.3%로 낮아졌다. 현대차·기아는 올해 글로벌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무디스, 피치 등으로부터 신용등급 A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정 회장이 수석부회장으로 취임한 6년 전 맞은 신용등급 강등을 설욕했다. 현대차·기아가 뛰면서 현대모비스와 현대위아, 현대트랜시스 등 부품사 실적도 함께 개선됐다. 그룹사 함께 신사업 생태계 구축정 회장의 눈은 미래로 향하고 있다. 자동차 판매 확대 목표를 없앤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 회장이 눈여겨보는 신사업은 자동차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소에너지, 로보틱스, 미래항공모빌리티(AAM) 등 그룹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다양한 신사업이 그의 시야에 들어 있다.

급변하는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비하는 차원도 있다.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이 ‘패스트 팔로어’에서 ‘퍼스트 무버’로 자리매김해 미래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기 위해 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 목적기반차량(PBV) 등에 주력하고 있다. 정 회장이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 중인 상황에도 임직원들에게 ‘미리미리’ 준비할 것을 강조하는 이유다.

신사업을 위한 생태계 구축은 그룹사가 함께한다. 대표적으로 수소 에너지 분야에서 현대모비스는 수소지게차, 현대로템은 수소전기트램을 개발하고 있다. 현대건설은 국내 최초 수전해 기반 수소생산시설을 건설 중이며, 현대제철은 그린철강 적기 공급을 목표로 밸류체인을 확장하고 있다.

정 회장이 취임사와 취임 이후 네 번의 신년사에서 많이 언급한 키워드는 ‘고객’(38회) ‘미래’(32회) ‘성장’(30회)이다. 고객이 원하는 제품에 집중하는 전략으로 세계 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게 그의 전략이다.

현대차그룹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것도 정 회장이 강조하는 대목이다. 소비자에게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는 것이 미래 성장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양궁이 그렇다. 대한양궁협회장을 맡고 있는 정 회장은 대한민국 양궁 신화를 써내며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의 가치를 보여줬다. 정 회장은 또한 튀르키예 한국공원을 재탄생시키고 영국 등 세계 각국의 문화예술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정 회장의 리더십 아래 일본 도요타에 이어 글로벌 톱2 기업을 향해 가고 있다. 현대차그룹 고위 관계자는 “현대차가 미래 글로벌 시장의 혁신적인 톱티어 회사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며 “그동안의 성과로 쌓아놓은 현금 등으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정 회장의 경영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후/신정은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