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네스북에 등재된 세상에서 가장 겁 없는 동물이 있습니다. 큰 고양이 정도 크기지만 그 무모함은 비할 동물이 없습니다. 자신의 몇 배가 되는 사자, 하이에나, 들개 또는 그 무리와 만나도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길을 막는 동물이 있으면 무작정 달려듭니다. 물리고 채이고 밟혀도 ‘닥치고 공격’이 유일한 전략입니다. 길이 수미터의 비단뱀과 코끼리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동물은 벌꿀오소리입니다.
거대한 발톱, 강한 턱, 질긴 가죽 그리고 ‘더러운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습니다. 벌꿀을 좋아하고 독사를 즐겨 먹는다고 합니다. 뱀에게 물리거나 독사를 먹어 죽은 줄 알고 보면 몇 시간 후 해독을 시킨 후 다시 돌아다닙니다.
최근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란 프로그램에 벌꿀오소리란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프로그램 중 유명 셰프(백수저)와 무명(?) 요리사(흑수저)가 요리 대결을 하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백수저 한 사람이 지정되면 그와 겨루고 싶은 흑수저가 ‘내가 맞서 보겠다’고 달려 나옵니다. 여러 명이 자원하면 백수저가 상대를 결정합니다. 그중 한 흑수저가 백수저가 나올 때마다 계속 해보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
3명의 백수저는 그를 거부했고 네 번째 지원해 맞대결이 성사됐습니다. ‘요리하는 돌아이’란 이름으로 출전한 흑수저는 자신을 “옆에 사자가 있어도 호랑이가 있어도 자기 갈 길 가는 벌꿀오소리처럼 유명 셰프한테 쫄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슐랭 1스타 등급을 받은 요리사와 경쟁했습니다.
결과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심 그를 응원한 것은 센 놈, 약한 놈 가리지 않고 닥치고 공격하는 황당한 벌꿀오소리가 갖고 있는 매력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기업들을 보며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를 떠올렸습니다.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창업자와 2세들은 벌꿀오소리와 비슷했구나 싶었습니다.
조선소가 뭔지도 모르면서 대통령이 해볼 생각 있냐고 하니 “무조건 하겠다”고 도전해 세계 1위 조선업체로 성장시킨 정주영 현대 회장. 그는 자동차 정비소를 하다가 기회가 오자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고, 무작정 미국에서 성공해야 한다며 1980년 무모하게 미국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이건희 삼성 회장도 반도체, 가전 분야에서 사자와 같았던 일본, 미국, 유럽 기업들을 상대로 벌꿀오소리처럼 전쟁을 벌여 결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을 만들었습니다. 또 전자업계의 벌꿀오소리 같은 삼성을 상대로 끝까지 경쟁해 살아남은 LG는 세계 가전 시장의 강자가 됐습니다.
철강, 화학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시바, 노키아, 파나소닉, 미쓰비시자동차 등이 한국 기업에 밀려 경쟁의 사바나에서 침몰한 기업들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삼성전자 실적부진에 CEO가 투자자와 고객들에게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불량품이 발생하자 핸드폰을 불지르며 전투 의욕을 불러일으켰던 이건희가 살아 있었으면 사과하는 것을 보고 뭐라고 했을까 궁금해집니다. SK그룹도 과거 경영진이 벌여놓은 사업을 뒤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한때 세계적 철강 기술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았던 포스코에 대한 우려도 큽니다. 그래서 ‘미래가 있는 회사는 현대자동차 정도다’란 말도 나옵니다.
더 큰 문제는 벌꿀오소리 같은 전투력의 상실입니다. 과거 한국 기업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애플이건 마이크로소프트(MS)건 소니건 도요타건 마주치면 한판을 겨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애플, MS, 엔비디아, 구글 등 미국 빅테크, 심지어 대만의 TSMC도 한국 기업들이 넘사벽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새로운 체제를 인정하고 먹이사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이란 정글은 그리 자비롭지 않습니다. 과거 한국 기업들이 벌꿀오소리처럼 공격해 넘어뜨렸던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도 그런 방식으로 대응하다 존재감 없는 기업으로 전락했습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미국 대선을 다뤘습니다. 해리스와 트럼프의 공약을 중심으로 한국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살펴봤습니다. 공약을 보면 기업들만 경쟁하던 정글에 미국 정부라는 포식자까지 가세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대한민국 기업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폐허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던 기업의 영혼을 다시 찾아야 할 시간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