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19세기엔 불 나면 사람보다 건물부터 챙겼다

입력 2024-10-04 18:48
수정 2024-10-05 00:47

1971년 크리스마스 오전, 서울 충무로의 고층 호텔 대연각 1층 커피숍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은 순식간에 번져 건물 전체가 연기로 가득 찼고, 건물 안 사람들이 객실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광경이 TV에 생중계됐다. 당시 서울시장과 내무부 장관, 대통령까지 현장을 찾아 구조를 지시했으나 이 사고로 실종자를 포함해 191명이 사망했다.

대연각 화재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화 등 방화 시스템이 마련됐지만,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화재 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6월 발생한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에선 23명이 숨졌고, 8월 부천 호텔 화재 사건에선 투숙객 7명이 사망했다. 국내에서 발생하는 화재 건수는 매년 4만여 건. 인명 피해는 2000명, 재산 손실은 1조원을 훌쩍 넘는다.

현직 소방관이 쓴 <소방의 역사>는 인류가 불과 싸워온 역사를 되짚는다. 역사적으로 고대 그리스, 이집트, 로마 등 문명이 번성한 곳은 예외 없이 엄청난 화재 피해를 입었고, 이후 소방 기술이나 조직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인류의 역사는 불을 다루고 화재 진압 능력과 기술 및 소방 조직을 발전시켜 온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근대적인 소방 체계를 갖추게 된 계기는 1666년 영국 런던에서 발생한 대화재다. 엿새간 이어진 이 화재는 런던 건물의 80%를 태우고, 인구 8만 명 중 7만 명의 살 곳을 앗아갔다. 화재 사건 이후 런던에선 화재 진압 장비 보유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이 만들어졌다. 물양동이보다 강력한 화재 진압 도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소방 펌프와 전문 소방대가 만들어졌고, 최초로 화재보험이 등장했다.

초기의 소방 시스템은 주로 건축물과 기계 등 재산을 지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도시의 방화는 건물 바깥에서 불길이 다른 건물로 번지는 것을 막는 데 집중했다.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안위는 그다음 고려할 대상이었다. 불을 피해 건물에서 탈출하다가 하나뿐인 출입구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압사하거나, 창문에서 떨어져 죽는 경우도 많았다.

인명 피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소방이 발전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현대에 들어서다. 소방대의 물줄기가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사다리차가 도입됐다. 불이 났을 때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 설치를 의무화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출구 문손잡이를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으로 밀면서 열도록 하는 이른바 ‘패닉 바’도 신속한 대피를 위해 발명됐다.

안전을 위한 법체계와 소방 기술의 혁신적인 발달에도 불구하고 화재로 인한 인명 피해는 왜 끊이지 않는 걸까. 저자는 ‘위험 감수성’의 부족에서 원인을 찾는다. 실제 화재 사고에서 사망자를 낳는 건 사소한 문제인 경우가 많다. 아파트 비상계단에 놓인 자전거나 계단 방화문을 열린 상태로 두는 도어스토퍼, 잦은 고장으로 일부러 중단시켜놓은 경보 설비 등 안전 불감증이 피해 규모를 키운다는 설명이다.

인류와 불의 관계부터 소화약제, 소화 기구, 소방차, 스프링클러, 경보 및 피난 설비, 소방관 등 그야말로 불과 소방에 관한 모든 역사를 망라한 책이다. 현직 소방관인 저자의 직업이 문장의 신뢰도에 더욱 무게를 싣는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