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한국에도 초파리는 넘쳐나는데

입력 2024-10-03 17:50
수정 2024-10-04 00:24
음식이 상해갈 때면 어딘가에서 나타나 ‘윙윙~’ 소리를 내며 신경을 건드리는 초파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이 곤충이 인류 유전학의 거대한 발전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초파리는 1만3000개 정도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데 인간과 60% 일치한다. 다운증후군, 알츠하이머, 자폐증, 당뇨병, 각종 암 유발 유전자 등 인간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 중 75%가 발견됐다. 열흘에 500개가량의 알을 낳을 정도로 번식력도 뛰어나 유전학 실험에 안성맞춤 모델이다.

초파리로 연구한 논문만 10만 건이 넘고, 6명의 과학자에게 노벨상을 안겼다. 노벨상 최다 수상 주인공은 ‘초파리’라는 우스개 얘기도 있다. 2017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미국의 마이클 모리스 로스배시 박사는 “초파리에게 감사한다”며 공을 돌리기도 했다.

초파리가 다시 한번 일을 냈다. 미국 프린스턴대 연구진이 초파리 성체의 뇌 지도를 완성한 것. 1982년 제작된 꼬마선충 이후 32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생물 성체 뇌 지도다. 여기엔 이기석 제타AI 박사, 배준환 서울대 기초과학연구원 박사, 김진섭 성균관대 생명과학과 교수 등 한국인 연구자도 참여했다. 뇌 질환 정복의 초석이 될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세계 각국이 벌이는 뇌 지도 경쟁은 20세기 미국과 소련의 우주 개발 경쟁을 방불케 한다. 생물학과 의학뿐만 아니라 인공지능(AI), 정보통신, 나노기술 등에도 일대 혁신을 몰고 올 것이란 판단에서다. 2013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10년간 30억달러(약 4조원)의 연구비를 뇌 지도 개발에 투자하겠다고 했다. 이듬해 유럽연합(EU)도 10년간 12억유로(약 1조8000억원)를 투입해 인공 뇌 제작에 착수했다. 일본도 유전자 조작이 쉬운 영장류인 마모셋 원숭이를 이용한 뇌 지도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우리 정부 역시 2023년까지 뇌 연구 신흥강국 도약을 위해 3400억원을 투자해 한국형 뇌 지도 구축에 나선다는 야심 찬 비전을 2016년 내놨다. 하지만 부분적인 연구가 진행될 뿐 성과는 전무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에도 초파리는 넘쳐난다.

유병연 논설위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