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기사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상 근로자라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대리기사가 플랫폼 기업 등 사용자와 경제적·조직적 종속관계에 있다면 대등한 지위에서 노무제공계약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도록 노조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취지다. 최근 들어 특수고용직군의 근로자 지위를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잇달아 나오면서 관련 업계에 미칠 파장이 주목된다. ○“소득 의존하는 대리기사도 근로자”
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지난달 27일 부산 지역 대리운전업체 A사가 대리기사 B씨를 상대로 제기한 근로자지위 부존재 확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 상고심 재판부는 “피고는 원고의 노조법상 근로자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A사는 2014년 5월부터 부산 지역에서 대리운전 기사를 모집하고 이들과 ‘동업계약’을 체결해 대리운전업을 했다. 이 회사는 또 다른 지역 대리운전업체인 C사 등과 대리운전 접수 및 기사 배정 등에 필요한 스마트폰 앱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콜’을 공유하고 기사를 배정했다.
B씨는 2017년 10월 A사와 동업계약을 체결하고 대리운전 일을 시작했다. 이 사건 공동피고 D씨는 C사와 대리기사 계약을 맺은 후 ‘부산대리운전산업노동조합’을 조직해 2018년 12월 부산시로부터 설립신고증을 받았다. 이들이 동업계약을 맺은 대리운전업체에 단체교섭을 요구하자 회사 측은 “대리운전 기사는 노조법상 근로자의 지위에 있지 않다”며 이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노조법 제1조는 헌법에 근거해 근로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보장하고 있다. 특수고용직 근로자와 사용자의 법정 싸움에서 노조법상 근로자 지위 인정 여부가 쟁점이 되는 이유다. 다만 노조법상 근로자는 노동3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을 때 인정하는 것으로, 퇴직금이나 해고의 제한 등 일반 정규직 근로자가 적용받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보다 폭넓은 개념이다.
대법원 판례는 노조법상 근로자를 판단할 때 △소득을 특정 사업자에게 의존했는지 △특정 사업자가 보수 등 계약 내용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지 △특정 사업자의 사업을 통해서만 시장에 접근하는지 △노무제공자와 특정 사업자의 법률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지속적, 전속적이고 지휘·감독 관계가 존재하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도록 하고 있다.
1·2심 재판부는 이런 법리에 비춰 대리기사는 노조법상 근로자가 맞다고 판단했고, 대법원도 원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봤다. 상고심 재판부는 “A사의 결정에 따라 B씨는 협력업체들로부터 콜을 배정받지 못하거나 배정이 제한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봤다. 또 “동업계약서에 따르면 대리운전 기사들이 납부해야 하는 수수료, 업무 수행 시 준수할 사항 등을 A사가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며 “B씨는 A사와 같은 대리운전업체를 통하지 않고 대리운전업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고 지적했다. ○대리기사 단체행동 늘어날 듯법원은 최근 특수고용직군의 근로자 지위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특수직 노동자의 단체행동이 한층 빈번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앞서 법원은 골프장 캐디, 학습지 교사, 자동차 대리점 판매원 등의 노조법상 근로자 지위를 인정했다. 올해 1월에는 CJ대한통운이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 판정 취소 소송 항소심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특수고용직인 택배기사들로 이뤄진 전국택배노조의 단체교섭 요구를 거부한 것은 부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지난 7월에는 택시 호출 플랫폼 ‘타다’의 프리랜서 운전기사의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지위를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조상욱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노동조사센터장)는 “오늘 판결로 대리기사업계의 집단적 교섭 요구가 늘어날 수 있고, 사용자 측에선 이를 거부할 근거가 약해졌다”고 분석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