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이면서 플랑드르 그 자체인 릴(Lille)
파리에서 릴까지는 기차 타고 약 1시간 거리, 프랑스 고속철도 TGV를 이용하면 쉽게 이동이 가능하다. 릴은 프랑스 북부 끝자락, 플랑드르 평야(Plaine de Flandre)에 위치한다. 플랑드르(영어로는 플랜더스, Flanders)는 11~14세기에 존재한 프랑스 북부, 벨기에 서부, 네덜란드 서부를 포함한 북해 연안 지방의 독립국이었다.
릴은 현재 프랑스의 국토이지만 루이 14세 이전에는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플랑드르, 스페인이 대표적이다. 릴은 또한 중세시대부터 상공업 발전의 중심지로 수세기에 걸쳐 그들만의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예술의 특성을 갖게 되었다. 이를 상징하는 것들이 그랑 팔라스(Grand Place) 광장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상업 도시이자, 산업 도시로 명성을 떨친 릴에는 수많은 사람(노동자)이 살았기에 그들을 수용하기 위한 집이 많이 필요했다. 덕분에 집이 한 채씩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빌라 형태로 한 동씩 묶여있다.
1층에 출입구는 여러 개이지만 멀리에서 봤을 때는 거대한 건물(집)이 광장과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들 빌라는 여러 세기에 걸쳐 다양한 색과 양식이 혼재된 결과물이다. 플랑드르(Flandre) 양식을 대변하는 아름다운 역사유물인 구 증권거래소가 대표적이다. 여신의 기둥 뒤편에 자리한 이 건물은 수많은 방을 만들어 임대수익을 벌어들였다.
그랑 팔라스를 중심으로 한 릴 올드타운의 건물들은 현재 미술관, 박물관, 극장, 카페, 펍, 베이커리, 명품 숍으로 오늘도 제 역사를 쓰고 있다. ‘라떼는 말이야’의 귀여운 진리가 승승장구하는 현장이다.
믿든 안믿든 눈을 감게 돼
종교적 섭리대로라면 신은 인간이라는 놀라운 피조물을 빚었다. 인간은 그러한 신을 찬양하기 위한 성전을 지었다. 자연적이지 않은 인공적인 공간, 그럼에도 어찌 이리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에게 생명을 준 신과 소통하는 신비롭고 복된 성전 노트르담 드 라 트레이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 de la Treille). 자개 장식처럼 치밀하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나무 그림자가 검은 실루엣을 드리운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신이 저기서 손짓하는 것 같다.
네오고딕 양식의 노트르담 드 라 트레이 대성당은 1854년에 착공하여 비교적 최근인 1999년 완공되었다. 외관의 파사드가 굉장히 모던한 반면 내부는 엄숙하고 장엄한 빛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감싸 잠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원형 장미 형태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대성당 정문에 배치해 실내로 빛이 투과하는 모습이 신성 그 자체로 느껴진다.
7만 여 점의 프랑스, 유럽의 미술 작품을 만나는 팔레 데 보자르
19세기 후반, 프랑스 건축미학을 엿볼 수 있는 역사 기념물, 1809년 개관한 박물관(Palais des Beaux-Arts)은 릴에서 꼭 가봐야 명소 중 하나다.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안토니 반 다이크, 페테르 파울 루벤스, 외젠 들라크루아, 프란시스코 고야 등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등 유럽을 대표하는 회화 작품과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카미유 클로델, 장바티스트 카르포의 조각품 등 7만 여 점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300년이라는 시간이 두 겹의 와플 사이에
릴에서 꼭 먹어봐야 할 디저트로 메에르트(Meert) 와플을 손꼽는다. 이 와플이 특별한 건 오랜 전통, 1677년에 문을 열었다. 그 다음은 당연히 맛. 두 개의 얇고 부드러운 와플 사이에는 진하고 풍부한 마다가스카르 바닐라 향이 배어있다. 커피와 따뜻한 차와 먹으면 ‘이 맛이 릴’이다.
릴에 도시 재생 벤치마킹하러 오시죠
올드타운의 골목길 끝자락에 오이뇽 광장(Place aux Oignons)이 있다. 오이뇽은 양파라는 뜻으로, 몇 세기 전 이곳이 튤립을 거래하던 현장임을 추측하게 한다. (튤립 구근은 양파처럼 생겼다.)
수많은 노동자가 살았던 오이뇽 광장은 1980년대 도시재생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고 레스토랑, 카페가 밀집해 관광객을 모은다.
20세기 초반 프랑스 북부의 전통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에스타미네 오 비유 레스토랑에서는 마루아유 치즈를 듬뿍 넣은 그라탕을 대표 메뉴로 선보인다. 릴의 대표 음식으로 마루아유 치즈와 맥주는 빼놓을 수 없다.
와인보다 맥주
프랑스하면 와인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릴에서는 맥주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도 좋을 것 같다. 릴에는 30개가 넘는 맥주 양조장이 자리해 레스토랑과 마트에서 고품격 수제 맥주를 손쉽게 맛볼 수 있다. 그중 하나가 셀레스텡(Celestin). 9대째 명맥을 잇는 맥주 양조장으로 화학첨가물 없이 바닐라, 꽃, 허브를 활용한 천연 수제 맥주를 선보인다.
(글, 사진) 정상미 한경매거진 기자 vivi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