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이나 그 후보들의 말은 언론에서 좇는 주요 화젯거리다. 2017년 3월 말 대선정국에서 터진 ‘삼디 논란’도 그중 하나다. 발단은 한 대선후보가 3D 프린터를 ‘삼디 프린터’라고 한 데에서 비롯했다. 일부 상대 후보 진영에서 용어도 제대로 모르면서 4차 산업혁명을 말할 수 있느냐고 비판하자 그가 반박했다. “우리가 무슨 홍길동인가? ‘3’을 ‘삼’이라고 읽지 못하고 ‘스리’라고 읽어야 하나?” 그는 한 주 뒤엔 5G(5세대 이동통신)를 ‘오지’라고 읽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파이브지’로 통용되는 업계에서 또 다른 논란거리가 됐음은 물론이다.
#. 최근 한 방송의 인기 시사 프로그램에는 그날그날 화제의 인물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보통 두 명 또는 세 명을 추려 ‘오늘의 핫 2’ 또는 ‘오늘의 핫 3’란 이름으로 패널들과 함께 분석한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이를 두 명일 때는 ‘오늘의 [핫 투]’로, 세 명일 때는 ‘오늘의 [핫 삼]’으로 각각 소개한다. 하나는 영어의 수사로, 다른 하나는 고유어 수사로 읽는다. 그는 어떤 차이로 [핫 투]와 [핫 삼]을 구별하는 것일까? ‘언어 순혈주의’ 대 ‘언어 혼혈주의’여기에는 우리말에서 아주 사소한 듯하면서도 잘 풀리지 않는, 곤혹스러운 난제가 하나 담겨 있다. ‘핫 3’을 [핫 삼]으로 쓰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핫 스리]로 할 것인가의 문제다. 외국말에서 들어온 이 단어인 듯, 단어도 아닌 말이 우리말의 합리성과 과학성에 계속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언어생활에 혼동을 초래하는 것이다. 우리말의 아킬레스건 중 하나다.
우리 어문규범에선 아쉽지만 이런 경우까지 발음법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준거로 삼을 용례가 없으니 더 혼란스럽다. 쉽게 말해 ‘엿장수 마음대로’인 셈이다. 하지만 별거 아니라고 치부하기엔 이미 우리는 정쟁거리로 비화했을 정도로 사회적 혼란을 많이 겪었다.
보기에 따라 여기엔 거대담론 못지않은 논점이 담겨 있다. ‘핫 3’나 ‘3D’를 [핫 삼] [삼디]로 읽는 것은 우리말 우선주의 관점이다. 우리 것이 있으니 우리말로 읽는다는 뜻이다. [핫 스리] [스리디]로 읽는 이들은 굳이 그런 관점에 얽매이지 않는다. 말의 자연스러움에 더 무게중심을 놓는다. 이들의 차이는 좀 거창하게 말하면 ‘언어 순혈주의 대 혼혈주의’의 다툼인 셈이다. 사례는 부지기수다.
우리말에서 숫자와 결합한 영어 표기가 단어처럼 쓰이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대략 1997년 말 외환위기 때부터다. 당시 우리 경제의 대대적 구조조정 속에 ‘빅(Big) 3’란 용어가 떠올랐다. 이를 읽을 때 대부분 [빅 삼]보다 [빅 스리]로 발음한다. 그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빅 삼]이라고 말한다.
이런 차이 말고도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따라 적을 때 뒤에 오는 조사가 달라진다는 문제가 있다. ‘[빅 삼]은/이/을~’인 데 비해 ‘[빅 스리]는/가/를~’로 표기가 달라진다. 표기와 발음은 ‘자연스러움’ 좇아야정보기술(IT) 산업이 발전하면서 ‘3D 프린터’란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예전에 ‘3D 산업’이란 말이 유행한 적도 있다. 이는 힘들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스러운(dangerous) 산업을 가리키는 용어다. 건축업·제조업·광업 등 이른바 굴뚝산업의 노동을 기피하는 데서 이를 ‘3D’라는 약어로 나타낸 것이다. 이때만 해도 이를 [스리디] 산업이라 하지 않고 [삼디] 산업이라고 읽었다. ‘3D(Dimensions)’는 이미 국립국어원에서 ‘3차원’ 또는 ‘입체’로 다듬은 말이다. 이때 함께 제시된 말이 ‘스리디, 스리디멘션’이다. 이런 걸 보면 이를 ‘삼디’라 하기보다 ‘스리디’로 읽는 게 일반적 방식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말이 결합하는 양태도 합성어를 이룰 때 한자어는 한자어끼리, 고유어는 고유어끼리 어울리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발음에서도 ‘자연스러움’을 좇는 게 일반적이다. 영어는 영어식으로 읽을 때 자연스럽다. <미스트롯 3>를 [~스리]라고 하지 [~삼]이라고 하는 이가 별로 없는 것도 같은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