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밥쌀용 쌀 소비는 갈수록 줄고 있지만, 간편식 수요 증가 등으로 인해 쌀 가공식품 시장은 급성장하는 추세다. 정부가 가공용으로 개발해 보급 중인 가루쌀(분질미)이 쌀 가공산업 성장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식품·외식업계도 앞다퉈 가루쌀로 만든 제품을 내놓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은 작년 56.4㎏으로 10년 전인 2013년(67.2㎏)보다 10㎏ 넘게 감소했다. 1인당 쌀 소비량은 1985년부터 39년간 매년 줄었다. 같은 기간 쌀 생산량은 442만t에서 370만t으로 19.5% 감소했다. 생산 감소보다 소비 감소 속도가 더 빨라 만성적인 쌀 공급 과잉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쌀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하고 수입산 밀을 대체하기 위해 가공에 적합한 쌀 품종인 가루쌀(품종명 바로미2)을 개발해 지난해 상용화했다. 2027년까지 가루쌀 생산량을 20만t으로 늘려 연간 밀가루 수요 10%를 대체한다는 계획이다. 가루쌀 재배 면적은 2022년 100㏊에서 지난해 2000㏊로 늘었다. 올해는 1만㏊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기존 밥쌀은 치밀한 전분 구조 때문에 물에 불려서 가공해야 했다. 가루쌀은 보통의 벼와 재배 방식은 유사하지만, 곡물 성질은 밀과 비슷해 물에 불리지 않고 바로 빻아 쓸 수 있다. 그만큼 제분 비용과 가공 시간이 덜 소요된다. 대규모 밀 제분 설비에 넣어 대량 생산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루쌀은 최근 ‘글루텐 프리’ 트렌드 확산으로 밀가루를 대신할 건강한 식재료로도 주목받고 있다. 가루쌀로 제품화된 쌀 가공식품은 각종 빵과 케이크, 면 종류, 맥주, 아이스크림, 튀김가루, 어묵 등 다양하다.
정부는 올해 ‘가루쌀 제품화 지원 사업’ 대상자로 식품·외식업체 30곳을 선정했다. 농심, 삼양식품, 하림산업, SPC삼립 등 식품 대기업과 성심당, 오픈런 열풍을 일으킨 런던베이글 등이 참여한다. 정부는 한 개 제품당 최대 3억원을 지원한다.
이들 업체는 지난 6월부터 본격적으로 가루쌀 제품을 쏟아내고 있다. 농심은 가루쌀로 만든 건면 제품 ‘별미볶음면 매콤찜닭맛’을 선보였다. 신세계푸드도 가루쌀, 현미유 등 식물성 원재료로 만든 우유 대체 음료 ‘유아왓유잇 식물성 라이스 베이스드’를 출시했다. 성심당과 런던베이글은 가루쌀 빵인 ‘초코미 마들렌’과 ‘단팥 쌀베이글’을 판매 중이고, SPC삼립은 가루쌀을 활용한 와플 등 신제품 네 종을 출시할 계획이다.
오뚜기는 지난달 밀가루 대신 쌀가루로 만든 ‘비밀카레’를 내놨다. CJ제일제당도 가루쌀로 만든 ‘비비고 우리쌀 만두’를 선보였다. 편의점 세븐일레븐도 농촌진흥청, 고래사어묵과 최근 업무협약을 맺고 바로미2를 활용한 어묵을 출시하기로 했다.
쌀 가공식품 시장 확대와 정부의 적극적인 해외 진출 지원으로 쌀 가공식품은 수출 효자 품목으로 떠올랐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쌀 가공식품 시장 규모는 2018년 6조3000억원에서 2022년 8조4000억원으로 4년 새 33%가량 커졌다. 같은 기간 쌀 가공식품 수출액은 8900만달러에서 1억8200만달러로 두 배 가까이로 늘었다.
식품·외식업계는 가루쌀 소비를 늘리려면 공급 가격을 지금보다 더 낮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루쌀은 1kg당 2000원대로, 수입산 밀가루(1kg당 1000원대)보다 두 배가량 비싸다. 농심 별미볶음면은 할인점에서 신라면(780원)보다 두 배 넘게 비싼 1980원에 판매되고 있다.
공급량 예측이 어려워 섣불리 신제품 개발이 망설여진다는 업체들도 있다. 한 식품업체 관계자는 “높은 공급가도 부담이지만 더 큰 문제는 물량 확보의 불확실성”이라며 “확보할 수 있는 가루쌀이 많지 않아 한정판 위주로 제품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헌형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