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전설들의 뉴욕 아지트…그곳의 리더가 한국인이라니 !

입력 2024-09-26 17:40
수정 2024-09-27 02:12

미국의 번영기인 1920년대를 ‘재즈 에이지(Jazz Age)’라고 부른다. 금주법은 사실상 유명무실했고, 1929년 대공황이 도래하기까지 술과 춤의 사치스러운 파티가 만연했다. 그 중심은 탐욕스러운 도시 ‘빅애플’(뉴욕의 애칭)의 밤이었다. 재즈는 전성기를 맞았고 뉴욕을 흔들었다.

뉴욕은 전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이다. 뮤지컬의 본류 브로드웨이, 포크뮤직의 산실 그리니치빌리지, 흑인 민권운동과 니그로 르네상스의 요람인 할렘은 여전히 젊은 보헤미안들의 집합소이며 다양한 인종과 사상이 공존한다. 태생부터 여러 인종 음악의 혼혈인 재즈와 뉴욕의 닮은 점도 거기에 있다. 다양성이 확보된 도시에서 재즈는 생명력을 부여받았다. 오밀조밀한 유흥업소들에 연주자들의 일자리가 있었고 라이브 문화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사진작가 윌리엄 폴 고틀립의 뉴욕 52번가 사진(1948년 5월 20일 밤)은 재즈사의 귀한 자료로 남아 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재즈클럽이 즐비하던 그곳에서 비밥(Bebop)재즈가 발생했다. 사진 속에는 ‘스리 듀스(Three Deuces)’ ‘오닉스(Onyx)’ 등 당대의 클럽들이 불을 밝히고 성업 중이다. 이런 작은 클럽에서 연주자들은 격의 없이 경연을 뽐냈다. 비밥재즈의 창시자로 통하는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가 52번가를 아지트 삼아 누볐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든 재즈 영화 ‘버드’(1988)도 이곳을 배경으로 한 찰리 파커의 스토리였다(버드는 찰리 파커의 별명이다).


뉴욕의 재즈클럽 중에서도 톱클래스로 꼽히는 ‘버드랜드’는 1949년 52번가 서쪽에 문을 열었다. 찰리 파커가 축하공연을 펼쳤고 이후 쳇 베이커, 프랭크 시나트라, 마일스 데이비스 등이 무대에 섰다. 그 역사가 70년을 넘어 현재까지 영업 중이고 재즈의 전설을 찾아온 관광객들로 붐빈다. 쳇 베이커의 생애를 다룬 영화 ‘본 투 비 블루’(2015)의 배경 신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버드랜드 무대에서 재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한국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홍혜선. 현대적 빅밴드의 리더이자 작·편곡가다. 현대적이라는 건 고전적인 스윙재즈와 결이 다름을 의미한다. ‘밥(Bop)’으로 통하는 모던재즈가 실험적인 풍미로 진화한 포스트 밥(Post-Bop) 계열이다. 비유하자면 팔랑팔랑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라 문장을 곱씹으며 읽어야 하는 책 같은 것이다. 이런 음악이 모더니스트들의 집결지이자 진보적인 뉴욕 재즈계의 현주소다. ‘그런 뉴욕에서 재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한국 여인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당차고 멋진 일이다.

얼마 전 홍혜선 씨가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 양평으로 찾아왔다. 미국인 남편이자 재즈기타 연주자인 맷 파나이디스의 서울 공연에 맞춰 함께 귀국한 것이다. 그녀는 짧은 일정 속에서 최근 발표한 자신의 앨범을 소개하고 한국 재즈계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한가롭게 시골 마을에 내려와 사는 내가 특별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디에서 그런 음악이 나오는 거냐고 물었다. 당신의 음악이 멋지고 실험적인 재즈던데, 일반인에게 어렵진 않을까 궁금했다.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제 음악이 익스페리멘털이라고요? 아니에요.” 물론 더한 것이 얼마든지 있는 뉴욕에서 그 정도는 실험적이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청중이 그런 음악을 온전히 즐기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뭐 하는 거지?’라며 멍하니 구경하거나 그중 몇 명은 이해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래서 재즈는 단순한 대중음악이 아니다. 부인할 필요도 없이 순수예술이고 쉽지 않은 길이다.

뉴욕과 한국의 거리는 꽤 멀다. 뉴욕과 양평의 거리감은 또 얼마나 될까. 멀리까지 찾아와준 그녀를 나는 응원하고 싶다. 그 거리만큼, 그래서 조금 더디겠지만 홍혜선의 활동을 한국에서도 알아줄 날이 올 것이다. 그녀는 다시 떠났지만 나는 며칠째 그 음악을 놓지 않고 있다.

남무성 재즈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