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냉전기 세계 경제의 키워드는 ‘밸류체인’(가치사슬)이었다. 연구개발(R&D)과 기획, 원자재 및 부품 조달, 제품 생산, 유통·판매 등 부가가치 창출의 전 단계를 각국 기업이 나눠 맡았다. 자유무역이 확대되고 정보기술(IT)이 발달하면서 세계 경제의 효율성은 극에 달했다.
이 같은 세계화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패권 경쟁을 거치며 밸류체인에서 ‘서플라이체인’(공급망)으로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지정학적 이유로 반도체나 핵심 광물을 안정적으로 조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다. 신뢰할 수 있는 국가끼리 글로벌 공급망을 빠르게 재편해 나가는 이유다.
대한민국은 글로벌 밸류체인의 최대 수혜국이었다. 자유무역 체제를 등에 업고 60년 만에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초고속 성장했다. 이제 초일류 선진국으로 한 번 더 도약해야 하는 시점에 커다란 도전에 직면했다. 어떤 지정학적 불확실성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 안보에 초점을 맞춘 정교하면서도 과감한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우선 미국 유럽 일본 등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이 새롭게 구축하는 공급망 안에 확실히 자리매김해야 한다. 중국과의 공급망 협력도 그런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 국제사회에서는 한국 경제 성장의 토양이 된 ‘규칙 기반의 다자주의 국제 질서’를 수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글로벌 사우스 국가 등과 긴밀히 협력하며 공급망을 다변화·안정화할 수 있다.
과학기술 역량을 키우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초격차 기술을 보유하고 모두가 필요로 하는, 그러나 아무나 만들 수 없는 제품을 공급해야 공급망 내에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 기초과학의 저변을 넓히고, 실험적인 연구에 과감히 투자해 과학기술 강국으로 도약해야 하는 이유다.
유창재 정치부장/송형석 테크&사이언스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