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된 예쁜 간판을 많이 보고 싶어요."
정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공개한 광주 각화초등학교, 빛고을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의 편지 중 일부다. 아이들은 '외국어로만 적힌 간판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고민 끝에 지난 7월 초 의원실에 입법 청원을 했다. "꼭 통과시켜주세요." 아이들의 소망은 약 두 달 만에 실제 법안 발의로 이어졌다. 22대 국회에서 초등학생들이 청원한 법원이 발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처벌 아닌 계도로"…옥외광고물법 일부개정안 발의
정 의원은 25일 오후 입법을 청원한 각화초, 빛고을초 학생 대표들과 함께 국회 소통관에서 옥외광고물법 일부개정안(일명 각화-빛고을한글간판법) 발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각화초 6명, 빛고을초 2명으로 이뤄진 학생 대표단은 등에 메고 온 가방을 기자회견장 바닥 한편에 내려놓고 연단에 올랐다.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간판 만들기",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간판법"이라고 직접 적어 만든 손피켓도 들어 보였다.
먼저 정 의원은 "국민의 대리자인 국회의원은 국민이 요구하는 법안을 만들 의무가 있으며, 국민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이 요구하는 법안을 국회의원에게 요구할 수 있다"며 "초등학생들이 자필로 청원을 한 만큼, 국회의원으로서 실제 법안 발의로 이어지는 과정을 직접 체험하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학생들을 국회로 초청했다. 이는 살아있는 민주주의 교육이 될 것"이라고 했다.
현행 옥외광고물법 시행령 제12조 2항에 따르면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맞춤법, 국어의 로마자표기법 및 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춰 한글로 표시해야 한다. 외국 문자로 표시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해야 하는 의무조항이 있다. 분명 의무로 규정돼 있지만, 해당 법을 지키지 않을 경우 처벌(500만원 이하 과태료)이 너무 무거워 오히려 바로잡기가 쉽지 않은 경우라고 정 의원은 짚었다.
정 의원은 "의무는 맞지만, 단속은 어려운 현실에 있다. 지키라고 법을 만들기는 했는데, 이 법을 지키지 않을 경우 처벌이 너무 강하다"며 "간판에 외국어만 썼다고, 외국어 밑에 한글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을 불러야 하고, 고발하고, 형사처벌까지 받게 해야 하니 어느 공무원이 그렇게 하겠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처벌이 아니라 계도할 수 있게 과태료 처분으로 낮추되, 과태료 처분 전에 충분히 계도할 수 있도록 해 한글 간판을 확산하자는 취지의 법"이라고 했다.
아울러 현행법이 건물 4층 이상에 설치되거나 면적이 5㎡ 이상인 간판만을 허가·신고 대상으로 정하고 있어, 3층 이하 건물에 외국어로만 적힌 간판이 난립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에 정 의원은 "건물 층수나 크기와 관계없이 한글 표기 의무 계도의 효율성을 높이도록 했다"고 했다."부탁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어요"
정 의원의 법안 설명에 이어 학생 대표단이 청원 배경을 직접 설명했다. 먼저 발표에 나선 빛고을초 4학년 1반 신서영 학생은 "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간판을 만들어달라고 부탁드리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됐다"며 "영어, 한자, 일본어 등 외국어로만 적힌 간판이 많아 불편을 겪고 있어,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마을에 있는 가게 간판들도 조사해왔다. 어떤 건 그림만 있거나 한글이 없었다. 그래서 외국어를 모르는 어린이나 어르신들은 간판을 읽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어 다음 발표자로 나선 빛고을초 4학년 1반 양태양 학생은 "이런 불편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 400명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3명 중 2명이 불편을 경험했다고 했고, 이름을 알 수 없어 무슨 가게인지 몰랐다는 사람, 다시 가고 싶어도 가게 이름을 알 수 없었다는 사람 등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며 "설문조사 내용을 가지고 주민센터, 구청, 시청, 시의회, 국회에 편지를 보냈고, 국회에서 응답해주셔서 이 자리에 오게 됐다"고 했다.
마지막 발표자로 나선 각화초 4학년 4반 박곤희 학생은 "한글 간판을 기업이나 가게가 알아서 만들어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 법이 적용돼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법을 만들고 개정하는 역할은 국회의원님들이 한다고 배웠다. 초등학생들의 제안을 소중히 여겨주시고 법안을 이렇게 발의하게 돼 매우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만약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가게 번창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우리나라를 관광하러 온 관광객들에게 우리말의 우수성도 더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손 모은 아이들 "꼭 통과시켜주세요"…의안과 직접 제출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아이들은 국회 본청 7층 의안과로 향했다. 처음 본 국회 풍경이 신기한 듯 '우와', '대박' 등 탄성도 중간중간 나왔다. 의안과에 도착해 아이들은 모두 손을 모아 의안과 직원에게 법안을 제출했다. "꼭 통과시켜주세요." 외치는 아이도 있었다.
법안을 직접 제출한 소감이 궁금했던 기자의 '백브리핑' 요청에도 아이들은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응했다. 가장 먼저 손을 번쩍 든 각화초 4학년 2반 손하일 학생은 "일단 여기 국회에 온 것만으로도 저의 인생에 영광이 느껴진다"고 첫마디를 떼 주변을 폭소케 했다. 이어 "각화초, 빛고을초 친구들도 땀 흘리며 편지를 썼으므로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며 "법안을 직접 접수하게 되니까 기분도 묘하고 좀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각화초 4학년 4반 추진우 학생은 "여기 온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으니까, 최대한 즐기고 기억해놨다가 커서 좋은 데 쓸 것"이라고 했다. 각화초 4학년 5반 김리원 학생은 "저는 (대표단으로) 올 때 경쟁 상대가 있어서 투표까지 했는데, 그 투표에서 이겨서 온 보람이 있다"고 웃어 보였다. 각화초 4학년 3반 조준오 학생은 "오늘 기자회견을 한 게 (22대) 국회에서 최초로 하는 거라 너무 뿌듯하고, 법이 꼭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각화초 4학년 4반 박곤희 학생은 "여기 오게 된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는데, 이렇게 기자회견도 하고 저희가 법안을 제출하게 된 첫 초등학생이라는 것도 영광"이라고 했다. 빛고을초 4학년 1반 신서영 학생은 "여기 온 게 운명인 것 같다. 국회가 전부 멋지다. 다음에 또 법을 만들어 여기에 또 오고 싶다"고 했다. 빛고을초 4학년 1반 양태양 학생은 "처음에 저희가 이걸 시작할 때 일이 커질 줄 몰랐는데, 무대 위까지 올라가서 되게 기분이 좋고, 꼭 법안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들을 인솔한 빛고을초 교사는 "아이들이 이 법안이 혹시나 소상공인들에게 손해를 끼치진 않을까 등을 놓고 열띤 토론을 펼쳤다"고 전했다. 정 의원은 아이들에게 '명예정책보좌관증'을 하나하나 수여했다. 한편, 초등학생 입법 청원이 실제 발의로 이어진 사례는 22대 국회에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21대 국회에서는 강준현 민주당 의원이 세종시 연서초 6학년 학생들이 제안한 '고라니의 죽음을 막아줘'라는 프로젝트 의견을 담아 도로교통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