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 속 초강대국들의 시작은 한결같이 미약했다. 최초의 대제국인 고대 로마, 세계 최대 영토를 일궈낸 중세 몽골, 현재 최강국으로 군림하는 미국도 주변국에 치이는 약소국이었다. 이들 나라는 그 한계를 깨고 무서운 속도로 인구를 늘리며 영토를 확장했다. 50만 명 남짓이던 고대 로마의 인구는 200여 년 만에 6000만 명 수준으로 불어났다. 중세 몽골은 정복 전쟁 초기 인구가 100만 명에 못 미쳤지만 100년 만에 1억 명이 넘는 대국으로 변모했다. 건국 당시 300만 명 정도이던 근대 미국 인구는 200여 년 만에 3억 명으로 급증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100~200년 기간에 인구가 100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들 국가가 초강국으로 변신할 수 있던 힘, 그리고 그 국가체계를 장기간 유지할 수 있던 원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적은 인구’였다. 이들 국가는 인구 열위를 타개할 방안을 개방성과 포용성에서 찾았다. 피지배층과 외지인에게 시민과 군인이 될 기회를 주고 고위 관료 자리도 열어줬다. 인종과 문화가 다른 민족의 관습과 제도를 과감히 차용했다. 문화와 종교, 사회 시스템의 이종 결합이 곳곳에서 이뤄지자 세계 각지에서 인재가 몰려들었다. 그 길을 따라 돈이 흘러들고 다양한 산업이 생겨났다. ‘팍스 로마나’ ‘팍스 몽골리카’ ‘팍스 아메리카나’는 인구 대국의 소산이 아니었다. 적은 생산 인구와 낮은 생산성을 극복하기 위해 전 세계의 인(人)과 재(財), 업(業)이 모이도록 국가 시스템을 바꾼 데서 비롯했다. 인구 감소의 재앙이 시작됐다
대한민국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를 내년에 맞는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에 들어선다. 국민 5명 중 1명 이상이 고령자인 시대다. 고령화 속도는 앞으로 더 빨라진다. 한국에선 매해 강원 삼척시(약 6만 명)만 한 인구가 사라진다. 2030년대엔 경기 안성시(약 19만 명)만 한 인구가 해마다 줄어든다.
인구 감소는 이제 시작이다. 50년 전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40만 쌍이 4~5명의 아이를 가졌다. 30년 전 아버지, 어머니들은 40만 쌍이 1.6명을 낳았다. 지금 우리는 30만 쌍이 0.7명을 출산한다. 이대로면 30년 뒤 자식들은 10만 쌍이 0.7~0.8명을 낳는다. 그때쯤 우리 인구는 4500만 명 안팎에 그친다.
‘일하는 사람’은 더 빠르게 사라진다. 지금 한국은 전체 인구의 71%인 3674만 명이 생산가능인구(15~64세)다. 20년쯤 뒤에는 이 중 1000만 명이 줄어든다. 그리고 50년 후엔 또 1000만 명이 감소해 전체 인구의 45% 수준인 1658만 명에 그친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역경을 넘어섰다. 수백 차례의 전란을 버텼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고통을 극복했다. 국가 부도 사태도 경험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차원이 다르다. 사상 초유의 ‘늙은 대한민국’이 시작되고 종국엔 ‘국가 소멸’이 우리를 기다린다. 이를 막기 위해 지난 18년간 예산 380조원을 퍼부었는데도 흐름을 돌리지 못했다.
이제 정책 틀을 바꿔야 한다. 출산율을 높이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인구 감소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회에 미칠 충격을 대비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그 충격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확산한다. 세대 갈등이 고조되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할 것이다. 연금은 고갈되고 의료체계와 지방 경제가 무너질 것이며 군사력도 약해질 것이다. 생산성은 계속 둔화하고 마이너스 성장률이 고착화해 다시 중진국으로 추락할 것이다. 과거 성공 방식은 안 통한다인구 감소와 저출생은 노동력의 양적 투입, 대기업 중심 산업 구조, 연공서열식 조직 문화,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고도성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우리 경제 시스템, 사회 시스템을 모두 점검하고 바꿔야 한다.
우선 생산성 둔화를 막는 것이 시급하다. 산업 전반에 업무 환경을 혁신할 기술 인프라를 마련하는 게 첫째다. 생산 현장은 로봇, 사물인터넷(IoT), 드론, 생산 보조 시스템 등을 도입해 스마트팩토리로 진화해야 한다. 사무 공간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클라우드컴퓨팅 등이 결합하는 디지털전환(DX)이 뿌리내려야 한다. 세대 변화와 인구 감소에 맞춰 업무 공간을 재설계하고 국가 차원의 재교육 시스템도 구축해야 한다.
인구가 줄더라도 생산 인력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도록 정책적 노력도 필요하다. 비경제활동인구 1600만 명, 그중에서도 특별한 이유 없이 ‘쉬는’ 250만 명을 생산 현장으로 불러내는 게 핵심이다. 그러려면 노동 정책과 직장 업무 문화를 손봐야 한다. 연금 개혁과 맞물려 정년 연장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그와 동시에 단단하게 뿌리 박힌 연공서열식 임금 체계를 타파해 직무급 중심으로 개편하는 게 필수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를 촉진하는 일·가정 양립 프로그램도 자리매김해야 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백수’를 업무 현장으로 끌어내는 다양한 당근책도 필요하다. ‘인구 늘리기’ 사활 건 경쟁산업 현장 곳곳에 혁신을 불어넣고, 가용 인력을 극대화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인구 감소에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한국이 도약하는 계기로 삼으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궁극적으로 인재와 자본과 기업이 몰리는 국가로 변모해야 한다. 개방성과 포용성이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고, 규제를 풀어 세계인이 한국으로 찾아오게 해야 한다.
인구 감소는 전 지구적 현상이다. 미국 워싱턴대 보건계량분석연구소(IHME)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합계출산율은 2021년 2.23명에서 2100년 1.59명으로 떨어진다. 특히 선진국을 중심으로 인구 감소가 두드러진다. 30년쯤 뒤에는 204개국 중 155개국의 인구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0.7명이라는 세계 최저 출산율을 기록한 한국이 가장 심각하지만, 해외 선진국도 대부분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각국이 세제 지원 등 인센티브를 내걸고 이민 제도를 손보는 등 인재와 기업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 그 경쟁은 이미 본격화했다. 인재·자본 유치에 발 벗고 나서야한국도 이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답답하다. 우리 인재 영입 경쟁력은 선진국 중 바닥에 가깝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에 따르면 한국의 ‘고급 두뇌 유출지수’는 4.66으로 전체 조사 대상 63개국 가운데 중간 이하인 36위에 머물렀다. 32위인 중국(4.93)에도 뒤진다. 인재 영입은커녕 유출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자본 유치를 둘러싼 경쟁도 상황이 비슷하다. 국제 투자이민 자문회사인 헨리앤드파트너스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전 세계 부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나라’로 아랍에미리트(UAE)를 비롯해 미국 싱가포르 호주 캐나다 스위스 일본 등이 꼽혔다. 한국은 ‘부자들이 빠져나올 나라’ 4위에 이름을 올렸다. 전쟁 중인 러시아보다 순위가 높다. 기업 유치 경쟁은 어떤가. 세계 각국이 막대한 기업 보조금과 인센티브를 동원해 글로벌 첨단 산업 유치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 한국은 기업들이 앞다퉈 생산 기지를 해외로 옮기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유턴 기업 건수가 연간 1000건을 오르내리는데 한국은 매년 20~30곳이 들어오는 데 그친다. 인구 감소,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다인구 재앙을 성장 기회로 바꾸려면 지금이라도 이 흐름을 돌려야 한다. 한국을 개방형 국가로 전환해야 한다. 우수하고 숙련도 높은 해외 인력을 끌어들이고 우리 인재의 유출을 막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다양한 나라의 인재들이 한국에서 직장을 잡고 체류할 수 있도록 취업·유학 관련 제도를 손질하고 영주권 문호를 열어야 한다.
한국으로 더 많은 자본이 유입되도록 하기 위해서도 손봐야 할 게 많다. 상대적으로 높은 상속세·소득세 세율을 뜯어고쳐야 한다. 외국인에게 취약한 정주 여건과 인프라도 이참에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 첨단 기업들이 국내에서 성장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경직된 고용 구조를 바꾸고 산업 규제를 해소하는 일도 필요하다.
인구 감소가 불러올 충격이 곧 우리 사회를 덮친다. 앞으로 5~10년이 골든타임이다. 인구 감소를 국가 도약의 기회로 삼을지, 저생산성에 신음하고 노인 빈곤과 양극화에 시달리는 3류 국가로 전락할지는 그사이에 정해진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고경봉 증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