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
앵거스 디턴 지음 | 안현실·정성철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만3000원“내가 이민을 온 1983년 이후 미국은 더 어두운 사회가 됐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원로학자이자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로, 미국 사회의 면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앵거스 디턴은 1980년대 초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했을 때 미국의 강점에 경외감을 느끼는 동시에 엄청난 빈부격차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빈곤과 은퇴, 최저임금, 의료체계 등 오늘날 가장 시급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특히 귀화한 미국 시민이자 경제학자로서의 시선이 함께 교차돼 흥미를 더한다.
저자는 경제학자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토대로 오늘날 미국 사회의 정치적 어젠다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는 미국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땅에서 ‘불평등의 땅’이 된 데에 경제학과 경제학자가 어떤 과오를 저질렀는지 지적한다. 보기 드문 개인적 통찰과 더불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관점을 결합함으로써 자신이 몸담고 있는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놀랍도록 솔직하게 비평하고 제2의 조국인 미국의 정책적 성과와 실패를 조명한다. 1990년대 미국에서 최저임금을 두고 벌어진 논쟁과 그 영향, 자신의 수술 경험을 통해 바라본 미국 의료시스템의 폐해, 빈곤의 원인과 해결 방법에 대한 논쟁, 소득과 자산 그리고 건강 불평등, 경제학계가 돌아가는 방식, 노벨상 및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와 얽힌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이 책에서 디턴은 경제학이 거둔 승리와 실패를 회고하고, 내부자로서 경험해온 경제학계의 현실과 생태를 생생하게 소개하며, 노벨경제학상에 숨겨진 후일담과 소회도 밝힌다. 경제학과 현실 정치 사이에서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문제와 갈등을 들여다보며 경제학에 과연 경제학자들의 정치적 편견을 넘어서는 실체가 존재하는지도 논의한다.
미국 내 이슈와 그와 관련해 벌어진 경제학계·정치계 내 논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지만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미국에 한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의미하다. 경제학이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를 탐색하면서 좌파와 우파 같은 정치적 진영과 상관없이 모두가 함께 읽고 풀어나가야 할 사안에 대해 다루고 있는, 1945년생 노학자의 학문적 여정이 고스란히 담긴 수작이다.
경제학자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 질문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인 ‘경제 실패는 경제학의 실패인가’를 통해 경제학과 경제학자의 반성을 촉구하며 다음의 말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정부와 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더욱 현실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돈이 인간 복지의 기준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사회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더 많이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학자들과 더 많은 교류가 필요하다. 그래서 한때 경제학의 중심에 있었던 철학적 영역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이 책은 철학자 피터 싱어, 퓰리처 수상 작가 매슈 데즈먼드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추천했고 뉴욕타임스, 파이낸셜타임스 ‘올해의 책’(2003년)으로도 선정됐다. 학술적 성격이 강했던 이전의 책과 달리 쉽게 쓰인 만큼 경제학에 대한 부담감은 내려놓아도 된다. 오히려 학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여러 경제학자의 삶과 이론을 다루고 있어서 경제학이 어떤 학문인지를 새롭게 알 수 있다. 경제학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경제학계 내에 있었던 첨예한 이론적·정치적 논쟁을 생생히 경험해보고 경제학이 나아갈 방향을 함께 고민해보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이혜영 한경BP 출판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