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텔을 중심으로 한 반도체 1위 국가였다. 메모리반도체인 D램을 처음 발명한 것도 인텔이었다. 넘어설 수 없을 듯한 아성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1위로 올라섰다. 인텔이 D램 시장을 등한시하는 동안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서버용 대형 컴퓨터에 쓰이는 고성능 D램 개발을 주도하면서다. 일본 기업들이 D램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자 반도체 가격이 폭락했고, 인텔은 1986년 1억8300만달러의 순손실을 봤다. 다행히 인텔은 컴퓨터를 비롯한 전자기기의 중앙처리장치(CPU)인 마이크로프로세서로 회생의 길을 찾았다. 인텔은 1991년 시작한 ‘인텔 인사이드’라는 마케팅 캠페인으로 소비자에게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가 PC업계의 표준이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하기도 했다. 반도체 패권의 이동하지만 이 같은 전성기도 길게 가지 못했다. 스마트폰의 등장에 따라 모바일산업으로 반도체업계가 빠르게 전환할 동안 이 흐름을 타지 못했다. 2018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사업에서 철수한 것도 인텔의 결정적인 판단 실패였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에 따른 반도체 쇼티지로 대만 TSMC와 삼성전자가 승승장구할 때 인텔은 땅을 치고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인텔은 2021년 파운드리에 재진출한다고 선언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열풍의 흐름도 놓쳤다. 인텔은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생성형 AI 소프트웨어용 칩인 가우디3를 포함한 새로운 AI 반도체 출시 행사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2023년에는 생성형 AI가 주목받았지만 2024년엔 AI 기술을 적용한 PC가 주목받을 것”이라며 “차세대 플랫폼 경험을 주도하는 것이 바로 AI PC”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올해 인텔은 눈에 띌 만한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에 사용되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급증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다른 공급업체를 활용할 수 있다”며 삼성전자와의 HBM 거래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인텔 위기에서 얻는 교훈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인텔을 통해 엄청난 자본 투자와 기술력, 복잡한 공급망 등으로 진입장벽이 매우 높은 산업으로 알려진 반도체업계에서도 기업의 흥망이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과거 일본 반도체 기업도 그랬다. 일본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1988년 50.3%를 정점으로 1990년대 들어 곤두박질치기 시작해 최근 10%까지 추락했다. 대형 컴퓨터에서 소규모 PC와 노트북으로 넘어가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를 두고 ‘일본의 조락(凋落)’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퀄컴의 인텔 인수 시도가 혹시라도 성공하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비롯해 파운드리 사업에서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AI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긴 하지만 칼자루는 퀄컴과 엔비디아 등 팹리스가 쥐고 있다. TSMC를 넘어서기도 쉽지 않다. 인텔이 삼성과 SK하이닉스의 미래가 되지 않도록 대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