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세상의 조롱에도 ‘반도체 신화’ 쓴
호암의 도전과 뚝심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삶은 그야말로 ‘도전과 뚝심’의 기록이다. 1910년 경남 의령에서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림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17세의 나이에 결혼해 자식 셋을 뒀지만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일본에서의 학업마저 건강상 이유로 중퇴한 그는 26세가 되던 해 노름을 하고 돌아온 어느 날 달빛에 비친 세 자식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깨닫고,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부유했던 아버지로부터 논 300석을 사업 자금으로 받은 그는 1936년 마산 ‘협동정미소’를 시작으로, 사업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어 1938년 자본금 3만 원으로 ‘삼성상회’를 세우고 운수업과 무역업, 제분업, 제면업, 모직업, 설탕, 비료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며 삼성 신화의 초석을 마련해 나갔다. 비단, 그 과정에서 성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 4·19 혁명, 5·16 군사 쿠데타, 12·12 사태 등 시대의 아픔 속에서 사업을 키워 나가며 부정축재, 사카린 밀수사건, 경영권 불법승계 등의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모험과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자신의 경영 철학인 ‘사업보국(事業報國)·인재제일(人材第一)·합리추구(合理追求)’를 실천해 왔다.
이후에도 그는 1969년 삼성전자, 1974년 삼성중공업을 설립하면서 전자와 중화학 분야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1983년 2월 8일 삼성과 우리나라 경제사의 운명을 뒤흔든 ‘도쿄 선언’으로 삼성은 또 한 번의 개혁에 나섰다. 호암 나이 73세 때의 일이다. 이 회장은 당시 업계의 냉소 속에도 반도체 사업 진출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가전제품용 고밀도집적회로(LSI)도 겨우 만들던 삼성전자의 반도체 진출을 두고 미국 인텔은 이 회장을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조롱했다. 이 회장은 숱한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반도체에 삼성그룹의 미래를 걸었다. 그 결과 도쿄 선언 후 불과 10개월, 삼성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했고, 1994년 9월에는 세계 최초로 256MD램을 선보였다. 이후 지난 20여 년간 삼성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 자리를 지켜 오고 있다.
이 같은 삼성그룹 신화의 시작에는 호암의 과감한 도전 정신과 뚝심이 있었다. 그는 1980년 7월 전경련(현 한국경제인협회) 강연에서 “결심하기 전에는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계획이 확정되면 과단성 있게 실행하는 것이 사업가의 기본 태도”라고 했다. 동시에 수출을 통한 국가 발전, 투자를 통한 일자리를 창출, 상생을 통한 사회공헌이라는 그의 기업가 정신은 창립 55주년을 넘긴 지금도 여전히 삼성전자의 핵심 경영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다.
드라마 대사 같은 그 한마디 “이봐, 해봤어?”
아산의 불도저 정신
“신용은 곧 자본이다”, “내가 살아 있고 건강한 한, 나한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이봐, 해봤어?” 등 숱한 어록을 남긴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그는 한국 현대 경제사에서 삼성그룹의 호암 이병철과 함께 창업 1세대 ‘성공 신화’의 상징으로 꼽힌다. 정 회장이 도전한 자동차, 조선, 중공업, 석유화학, 건설, 전자 등 이른바 ‘중후장대형’ 사업은 한국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15년 강원도 통천군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정 회장은 소 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해 인천에서 막노동을 했다. 쌀가게에 취직해 일하다 3년 만에 가게 주인으로부터 쌀가게를 넘겨받으며 밑천을 마련했다. 이후 ‘아도서비스’라는 정비 업체 사장이 됐고 이는 후일 현대자동차의 모태가 됐다.
그는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세워 본격적인 기업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50년 두 회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을 설립한 뒤 1967년에는 현대차를 세웠고, 1968년에는 2년 5개월이라는 세계 최단 기간 완공 기록을 남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착공했다.
이후에도 정 회장의 불도저 같은 도전 정신은 조선업까지 이어졌다. 당시 그가 조선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하거나 비웃었지만 “이봐, 해봤어?”란 말로 무마하고 세계 최대 조선 업체를 일궈냈다. 1973년 현대조선중공업, 1975년 현대미포조선을 세웠다.
조선소가 없는 상황에서도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에게 26만 톤급 2척을 수주하고, 영국의 바클레이스은행을 찾아가 은행의 담당 임원에게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설득해 차관을 얻은 일화는 유명하다.
뿐만 아니다. 정 회장은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으로 일본을 물리치고 올림픽을 유치한 장본인이자, 1998년 6월과 10월 통일의 꿈을 품고 소떼 방북이라는 대형 이벤트를 개최했다. 이는 민간인 최초로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으로,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튼 세기적 사건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이 “1991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래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비단, 그에게 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익성 없는 대북 사업으로 그룹이 자금난을 겪었고,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1950년 한국전쟁 전후 한국의 경제 발전 중심에서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동시에 역사는 정 회장을 남북 화해와 협력, 교류의 신기원을 개척했다는 평가와 시대사적 사명을 인식하고 분단의 벽을 뛰어넘은 현대사의 걸출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위기의 승부사’, ‘세기의 도전자’, ‘불굴의 개척자’라는 수식어가 여전히 그의 이름 앞에서 빛나는 이유기도 하다.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
연암의 인화단결과 개혁정신
LG그룹의 DNA엔 연암 구인회 회장의 ‘인화(人和)단결’이 흐른다. 창업 당시 회사가 작아 주로 가까운 사람과 회사 운영을 하는 상황에서 서로 신뢰하며 맡은 바 책임을 다하자는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구 회장은 국내 최초로 플라스틱공업, 전기, 전자, 무역, 석유화학, 전선, 통신, 언론 등 각 분야에서 근대적 기업군을 일궈낸 선구적 기업가로 꼽힌다. 그는 1931년 경남 진주시에서 구인회상점이라는 상호명의 포목상을 시작으로, 1940년 주식회사 구인상회로 발전, 사업 운수와 무역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조선흥업사를 설립, 1947년 LG그룹의 직접적인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1958년에 금성사(현 LG전자)가 설립되는 것으로 오늘날 LG그룹의 초석을 다졌다. 금성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자공업회사로, 1959년 ‘골드스타’라는 상표를 단 최초의 국산 라디오 제품을 출시했고, 이후 선풍기, 흑백TV, 냉장고, 에어컨 등 주요 가전제품들이 잇달아 생산한다. 당시만 해도 불모지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개척자 정신으로 성장 산업을 이끌었다는 게 재계 중론이다. 그리고 그 배경엔 연암의 ‘인화단결’과 ‘개척정신’이 거름이 됐다.
유명한 일화로 금성사가 세탁기 개발을 막 시작하던 1960년대 초반 무렵이었다. 방콕 출장을 다녀온 허신구 락희화학공업 상무가 경영진들 앞에서 “가루를 뿌리니까 거품이 많이 나고 때가 말끔하게 빠지더라. 합성세제라고 하는데, 우리도 당장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임원들의 반응은 “그거 만들었다가 애써 만든 빨랫비누가 안 팔리면 어쩌냐”며 회의적이었다.
이때 구 회장은 “사람이 이렇게 우길 때는 나름대로 확신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 상무 말대로 한번 해봅시다”라고 상무의 의견을 지지했다. 그러나 초기 합성세제인 하이타이의 판매량은 저조했고, 더 큰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생산을 중단해야 할 시점이 왔다.
하지만 허 상무는 되레 광고비를 더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번에도 구 회장이 그의 의견을 수용했다. 그 결과 연말부터 하이타이에 대한 반응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후 하이타이는 대한민국 가루 형태 합성세제를 대표하는 상표가 됐다. 훗날 구 회장의 성공 비결은 제품이 아닌 사람이었다며 “한 번 믿으면 모두 맡겨야 합니다. 책임을 지면 사람은 최선을 다하게 돼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열의만 있으면 능력을 키워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구 회장의 개혁을 위한 인화,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중이 빛을 발한 셈이다.
이 밖에도 구 회장의 또 다른 경영 철학은 ‘연구·개발’이다. 그의 개척정신이 사업의 영역을 선택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거시적 차원의 철학이라면, 연구·개발은 개척정신을 성공으로 이끌어준 이념이었다. LG는 1950년대 열악한 경영 환경 속에서도 공장을 세우기 전에 연구실을 설립해 연구설비를 들여왔다. 이후에도 그의 의지가 이어져 1970년대 한국 민간기업의 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이는 1990년 구자경 회장이 LG의 새로운 경영 이념을 정립하면서 발전했고, 현재까지 4대를 이어 계승되고 있다.
불모지에서 ‘섬유에서 석유까지’
담연의 겨레를 향한 사명감
담연 최종건 SK그룹 회장은 48세로 단명했지만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경성공립직업학교(현 서울과학기술대) 기계과를 졸업한 그는 1944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 공장에 견습기사로 들어가면서 의류 산업에 발을 들였다. 그는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불철주야로 일했다.
그리고 이때 번 돈으로 1953년 그는 한국전쟁 직후 선경직물을 인수했고, 버려진 직기 4대를 재조립해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사업은 빠르게 성장했고 1950년대에 국내 최초 합성작물인 나일론·데드론, 1960년에는 크레폰·앙고라 등을 생산하며 국내 의류 산업을 부흥시키며 SK그룹의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그는 생전에 자신의 세대가 “겨레의 장래를 가름할 무거운 사명을 지니고 있다”며, 사업보국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힘을 썼다. 최 회장은 그 실마리를 수출에서 찾았다. 당시 외국 기업과 연결된 작은 인연 하나 없는 상황에서 무모한 도전 끝에 1962년 대한민국 최초의 직물 수출 기업으로 이름을 올린 것도 기업가로서 그의 사명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후 선경직물은 1966년 선경화섬을, 1969년에는 선경합섬을 잇따라 설립하며 ‘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SK그룹의 원대한 포부를 그려 갔다. 그는 직물 사업에 머무르지 않고 아세테이트 원사와 폴리에스테르 원사까지 확장하는 생산 기반을 마련했다. 당시 직물 생산 업체가 원사까지 발을 뻗친다는 것은 자본과 기술의 명백한 한계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동생인 최종현 회장의 지혜도 더해졌다. 최종현 회장은 위스콘신대 화학과를 졸업한 후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인재로, 폭넓은 지식과 경제이론은 선경직물의 도약에 자양분이 됐다. 최종건 회장은 실전에 강하고, 동생은 이론으로 무장해 둘의 조화가 경영의 하모니를 이뤘다. 사람들은 두 형제를 ‘선경의 용장과 지장’ 혹은 ‘선경의 쌍두마차’라고 불렀다.
이후 1973년 1월에는 정부로부터 서울워커힐(현 쉐라톤워커힐)호텔을 26억 원에 인수하며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지만 최종건 회장은 같은 해 11월 폐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형의 유고로 최종현 회장이 기업을 승계했을 때 지정학적 위기와 석유파동으로 사업은 존폐 위기에 직면했지만, 최 회장은 위기 상황을 오히려 체질 개선과 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SK는 SK경영체계(SKMS) 정립, 유공 인수 및 수직계열화 완성, 정보통신 사업 진출 등을 통해 바이오·배터리·반도체를 중심으로 비즈니스 포트폴리오의 혁신을 거듭하며 양적·질적 성장을 이뤘다.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