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청천벽력'에 담긴 우리말의 오묘함

입력 2024-09-23 10:00
수정 2024-09-23 16:08

역대급 폭염을 기록한 여름을 보내고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감돈다. 어제(9월 22일)가 추분(秋分)이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이다. 이날이 지나면 점차 밤이 길어지기 때문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도 계절이 바뀌었음을 실감한다.‘청천(靑天)’은 고유어로 ‘마른하늘’지난주에 있었던 추석(9월 17일)은 음력을 기준으로 하지만, 추분은 양력을 기준으로 한다. 또한 추석은 명절인 반면, 추분은 24절기 중 하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명절을 “해마다 일정하게 즐기고 기념하는 날”로 정의한다. 우리나라에선 설과 추석이 대표적 명절이다. 추석은 음력 8월 보름날이다. 이 무렵 논밭의 곡식이 익어 농부들은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곡식을 거두어들인다. 추석엔 갓 수확한 햅쌀로 송편을 빚고 햇과일 따위의 음식을 장만해 차례를 지낸다. 즉 가장 먼저 조상에게 감사드리고 가족이나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게 이날의 풍습이다.

이에 비해 절기란 한 해를 스물넷으로 나눠 농사의 기준으로 삼던 날이다. 전통적으로 계절을 구분하는 표준으로 삼았다. 한 달에 두 번 절기가 들어 가령 가을이면 입추부터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까지를 말한다. 그다음 절기가 입동(立冬)인데, 이때부터 겨울로 친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는 입추(立秋), 밤 기온이 내려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백로(白露), 낮보다 밤이 길어지는 교차점인 추분(秋分), 기온이 더욱 내려가 찬 이슬이 맺히는 한로(寒露), 겨울이 오기 전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상강(霜降). 자연의 이치가 담긴 우리말의 깊은 뜻을 알고 나면 우리말의 오묘한 맛을 더 세세히 느낄 수 있다.

추분 전후해선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어 청명한 날씨가 이어진다. 하늘은 높고 맑다. 이를 가리켜 ‘청천(靑天)’이라 한다. 이 시기에 자주 쓰이는 말이다. 청천을 직역하면 푸른 하늘인데, 이는 맑게 갠 하늘을 의미한다. 순우리말로 하면 ‘마른하늘’이다. ‘마르다(물기가 다 날아가서 없어지다)’와 ‘하늘’을 결합한 것으로, 이 같은 형태를 띠는 합성어가 꽤 있다. 마른기침, 마른나무, 마른날, 마른논, 마른땅, 마른밥, 마른번개, 마른벼락, 마른안주, 마른장마, 마른침 등이 그러하다.원래 웅혼한 필체를 나타낸 말“가을날답게 청천의 드높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이즈음 날씨를 나타낼 때 써먹기에 좋은 말이다. ‘청천’도 여러 합성어를 만들어냈다. ‘청천백일(靑天白日)’이라고 하면 하늘이 맑게 갠 대낮을 가리킨다. 이를 강조해 ‘청천대낮’이라고도 한다.

‘청천’과 어울리는 말 중에 ‘청천벽력’ 같은 재미있는 말도 있다. ‘푸를 청(靑), 하늘 천(天), 벼락 벽(霹), 벼락 력(靂)’을 쓴다. 맑게 갠 하늘에서 치는 날벼락이란 뜻으로, 뜻밖에 일어난 변고나 사건을 비유적으로 이른다. 우리말 안에서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란 속담으로도 자라 잡았다. “대낮에 마른벼락”도 같은 말이다.

‘청천벽력’은 지금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원래 용사비등한 필체를 가리키는 말에서 왔다. 중국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가 자신의 멋들어진 필치를 두고 “푸른 하늘에 벽력을 날리듯 한다”라고 한 말에서 유래했다. 나이 들어 병마에 허덕이던 그는 어느 날 홀연히 일어나 시를 지었다. “방옹이 병으로 가을을 지내고(放翁病過秋), 홀연히 일어나 취하여 글을 쓰니(忽起作醉墨), 정히 오래 움츠렸던 용과 같이(正如久蟄龍), 푸른 하늘에 벼락을 치네(靑天飛霹靂).”(두산백과) 마지막 연에 ‘청천벽력’이 나온다. 그는 자신의 붓놀림이 웅장함을 나타내는 말로 ‘청천벽력’을 썼다. 이 말이 후대에 ‘뜻밖의 큰 변’을 가리키는 부정적 의미로 바뀌어 쓰이니 말의 오묘함에 새삼 놀랄 뿐이다. 우리말 속담에는 “마른날에 벼락 맞는다” “대낮에 마른벼락”이라 해서 ‘뜻밖의 일로 당한 화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은 ‘뜻하지 아니한 상황에서 뜻밖에 입는 재난’을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