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 주범' 철강, 수소를 만나 오명 벗는다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입력 2024-10-17 08:34
수정 2024-10-17 08:42
이 기사는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글로벌마켓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콘퍼런스에서든 치즈버거를 먹을 때든 기후위기 해결 방안에 대해 얘기할 때 저는 항상 이런 질문을 합니다. 철강은 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신지?"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로 현재는 은퇴 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브레이크스루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빌 게이츠가 2019년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바로 철강업의 탈탄소화 문제다. 전 세계 탄소배1출량의 7~8%는 철을 만들면서 나온다는 점에서다.

5년여가 지나 지난달 찾은 스웨덴에서는 그 해답을 찾는 속도가 더욱 빨라져 있었다. 스웨덴 철강사 SSAB과 국영 전력기업 바텐폴, 철광석 기업 LKAB가 2016년 합작 설립한 하이브리트의 수소환원제철공법(MIDREX) 덕분이다. 하이브리트는 2021년 세계 최초로 화석연료 없이 만든 철강(SSAB Fossil-free)을 선보였다.

일반 철강의 1㎏당 탄소배출량이 2㎏에 달하는 데 반해 SSAB의 철강은 배출량이 없다. 탄소중립 시대 신(新)무기가 된 SSAB의 수소환원제철공법은 2026년 본격 시행되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로 날개를 달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유럽연합(EU) 역외의 철강 제품이 유럽 국경을 넘으려면 탄소 배출 비용의 차이만큼 탄소세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스톡홀름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위치한 SSAB 사무실에는 '세계 최초의 무(無)화석연료 철강'이 전시돼 있었다. 마틴 페이 최고기술책임자(CTO·사진)는 이날 인터뷰에서 "현대사회에서 철강은 자동차와 선박, 가전제품 등 어디에서든지 필요하다"며 "만약 우리가 배출량 없이 조강을 할 수 있으면 산업을 위한 솔루션이 될 거라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SSAB은 원래 고로 공정에서도 탄소 배출량을 낮추는 혁신을 이룬 바 있다. 40여년 전 LKAB와 함께 철광석을 분쇄해 직경 10~12㎜짜리 둥근 알갱이 상태의 펠릿을 사용하는 기술을 개발하면서다. 펠릿을 사용한 이후 고로의 효율성이 개선됐고, 산소 환원제인 석탄의 사용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SSAB 공장 2곳이 스웨덴 전체 탄소배출량의 10%를 차지한다는 점은 부담과 압박이 됐다.

2015년 친환경 철강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결정한 SSAB은 이듬해 합작사 하이브리트를 세웠다. 4년 전엔 북부 도시 룰레오에 있는 SSAB의 고로 설비 옆에 시범 플랜트를 설치했다. 샤프트 환원로 방식의 직접환원철(DRI) 생산 설비다. 펠릿을 샤프트 환원로에 투입해 수소와 반응시켜 산소를 제거하고 DRI를 얻는다.

이 과정에서 부산물로 발생하는 수증기는 응집시켜서 물로 만든다. 이 물을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가능 전력으로 전기분해해 다시 수소와 산소를 생산하고, 재생산된 수소는 샤프트 환원로에 다시 투입될 수 있다. 수소의 '무한 리사이클'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다. 재생가능 전력의 간헐성을 고려해 250바로 압축한 수소 저장소 운영도 성공적이었다.


페이 CTO는 "펠릿을 만들 때도 화석연료 대신 제지 산업에서 부산물로 나오는 바이오연료를 써보는 테스트를 1년 간 진행했고, 결과가 매우 좋았다"며 "LKAB가 바이오연료 기반 펠릿 제조를 상용화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룰레오의 하이브리트 실증 프로젝트는 8월 말 끝났다. 룰레오 공장 등이 완공되면 SSAB은 2026년부터 연간 250만 톤의 친환경 철강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게 된다.

기존 고로는 단계적으로 폐지해 2030년이면 친환경 철강사로 거듭난다는 계획이다. 친환경 철강의 가격은 기존 고로 공정 대비 20~30% 가량 비싼 것으로 추산되지만, CBAM 도입과 탄소 가격 증가 등을 이유로 수요가 폭발하고 있다고 페이 CTO는 설명했다.

그는 "시범 플랜트에서 만든 소량의 탄소 제로 철강을 볼보 그룹의 트랙터와 스웨덴 건물을 만드는 데 써봤고, 모두 성공적이었다"며 "현재까지 60개 이상의 파트너들을 확보했는데, 이들 모두 SSAB에 투자해서 우리의 설비를 스케일업하는 데 동참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이어 "SSAB의 자체 자본력과 고객사의 수요 증가, 기후위기 대응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같은날 스톡홀름에서 만난 스웨덴의 친환경 철강 스타트업 스테그라(옛 H2그린스틸)의 프로젝트파이낸싱 본부장 크리스토프 진서는 "친환경 철강에 대한 고객사들의 수요에 따라 2020년 회사를 세우게 됐다"고 말했다. 스테그라의 설립 동력에는 미리 철강을 구매하기로 약속한 고객사가 프리미엄 가격을 지불하고 투자하는 오프테이커 모델이 있다는 설명이다.

지속가능 금융을 표방하는 금융사들과 장비 공급사 등의 투자금, EU 혁신펀드 자금도 큰 도움이 됐다. 대기업으로 몸집이 큰 SSAB에 비해 스타트업으로서의 장점도 톡톡히 누리고 있다. SSAB이 기존 장비를 전환하느라 타임라인이 뒤처진 데 반해 아예 새로운 판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스테그라는 2022년부터 북부 도시 보덴에 그린수소 전해조-DRI-철강 크게 3개 공장 구역으로 나뉜 일종의 산업 단지를 짓고 있다.

2026년 완공 목표인 이 산업 단지에서 연간 250만 톤의 친환경 철강이 생산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진서 본부장은 "스테그라는 '원 플로우 프로덕션'으로 수소 생산, 운반 등이 한곳에 모아져 있어서 비용 절감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말린 욘손 프레드릭손 대외협력팀장은 "우리는 매순간마다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방식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며 "당초 모두가 10년 걸릴 거라 예상했던 정부 허가도 우리는 1년 반 만에 받아냈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4년 KPF 디플로마 기후변화대응 프로그램 지원을 받아 보도됐습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