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올림픽의 자부심! 스텔라 88.’
아버지는 새벽 일찍 마른걸레를 들고 나가신다. 어제도 백수메리(白壽메리·속옷 및 잠옷 의류 제조기업 쌍방울의 제품)에 땀이 다 젖을 정도로 정성스레 닦아놓은 스텔라 88에 먼지라도 앉을세라 서두르는 참일 테다. 현관 앞에는 형형색색 보자기로 꽁꽁 싸맨 추석 선물이 우리 발걸음을 재촉하는 듯 가지런히 놓여 있다.
여섯 살이 됐는데 아직도 손가락을 빠냐며 어머니의 핀잔을 들은 동생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거실 바닥에서 이불을 껴안고 뒹굴뒹굴하고 있다. 어제 목욕탕에서 어머니가 얼마나 힘차게 때를 밀어주셨는지 등이 아직도 따끔따끔하다. 추석 연휴 전이면 온 가족이 목욕탕에 가서 세신을 한다. 그 덕에 동네 친구들도 그곳에서 만나 서로 눈을 찡긋하고는 한다.
전남 강진군 성전면. 머나먼 지도 끝자락에 닿아 있는 곳. 외가댁까지 가는 동안 볼 산과 나무, 논밭을 생각하면 차를 타기 전부터 벌써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는 듯했다. 바리바리 짐을 싣고 아버지의 귀한 스텔라 88에 올라탔다. 어머니는 가는 길에 들을 애청곡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착착 준비해 보닛에 올려놓고, 동생은 손가락을 쪽쪽 빨며 출발과 동시에 다리 한쪽을 내 무릎에 척 걸쳐 놓았다.
국토대장정우리 가족에게 추석의 시작은 그랬다. 7시간, 9시간…. 막히면 막히는 대로 뚫리면 뚫리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도로와 그 옆으로 드리운 논밭, 산등성이를 구경하다가 지칠 때쯤 도착하곤 했다.
외가댁에 갈 때마다 우리나라가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느꼈다. 얼마나 남았냐고 물으면 ‘거의 다 왔다’는 대답만 돌아오니 어느 순간 묻지도 않았다. 자고 또 자서 잠이 안 올 때면 아버지가 운전석 뒷주머니에 꽂아둔 전국 교통지도를 펴 들고 우리가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손가락으로 따라가 봤다. 다음에 나올 마을에 미리 손가락을 얹어 놓고 정확히 그곳을 지나갈 때면 속으로 혼자 신났었다.
스텔라 88 뒷좌석에 두 다리를 쭉 뻗고 편하게 잠든 동생을 보고 입을 삐죽거리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얼굴을 떠올렸다. 힘들고, 지루하고, 멀미 나는 긴 여행에도 우리를 보면 버선발로 뛰어나올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을 생각하면 잠깐이나마 멀미가 씻은 듯 나았다. 전라도와 경상도에 흩어져 사는 친척들 덕분에 매년 우리의 추석은 강진, 목포, 부산, 대구 등지로 종횡무진했다. 스텔라 88이 나이가 들어 보내줄 때쯤 국토대장정은 끝났다. 어느 때부터인가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달음 쳐 오는 할머니를 만나 우리 집으로 향하고는 했다. 친척과 사촌의 얼굴과 목소리는 잊혀 갔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추석을 추억하다애청곡 카세트테이프를 챙기던 어머니처럼 내 휴대폰엔 성묘 가는 길에 들을 최신 톱100 리스트가 들어 있다. 운전의 피로를 덜기 위해 스스로 수혈할 진한 콜드브루 커피를 제일 먼저 주문한다. 고작 두 시간 남짓 가는 길에 칭얼거릴 아이들이 걱정돼 전전긍긍하고, 형형색색 보자기 대신 각지고 멋진 새벽 배송업체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음식을 넣는다.
나의 추석은 많이 바뀌고 더 이상 멀미도 나지 않지만, 왜 어린 시절 힘들었던 추석 길이 계속 생각나는 걸까. 아마 여행길 끝에 맛보던 추석의 따뜻한 기운들이 추억 속 더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인 듯하다.
면 보자기에 향 좋은 솔잎과 같이 넣어 놓은 송편을 따뜻하게 쪄 입에 넣어주던 외할머니, 통통한 해남 새우를 구워 소쿠리에 한 바구니 담아놓고 정성스레 발라 밥그릇 위에 놓아주던 외할아버지, 저녁이면 갓 부쳐낸 전과 막걸리를 옆에 놓고 화투를 치며 아이들처럼 신났던 어른들, 앞마당에서 구슬 치고 땅따먹기 하던 사촌들. 이 모든 기억이 일곱 시간 멀미를 잊게 하는 나의 추억 속 추석이다.
이제는 많이 변하고 잊혀 가는 멋진 추석 풍경을 아이들에게도 간접적으로나마 보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적은 양이지만 전을 지글지글 부치면 냄새 맡고 부엌에 찾아든 아이들이 호호 불며 손으로 집어 먹고 맛있다고 또 와서 등 뒤에 줄 서서 기다리는 모습에 추억 속 추석을 되찾은 느낌이 든다.
명절이 다가오면 매번 책꽂이에서 멋진 추석 풍경을 담은 책을 모두 꺼내 읽어주고는 한다. 아이들은 장면마다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질문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버스를 타려고 길게 줄지어 선 한복 입은 사람들의 그림, 송편을 빚는 각양각색의 그림, 손에 손을 잡고 보름달 아래에서 강강술래 하는 그림, 제사를 지내는 그림 등 아이들에게는 낯선 모습이다. 그림책 속 추석과 나의 추석 이야기, 아이들의 이야기로 밤이 깊어진다. 이렇게 나의 추석은 변해가지만 보름달만은 여전히 휘영청하다.
박효진 ‘길리북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