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고 또 따뜻했다…잔나비 10주년 서사,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리뷰]

입력 2024-09-10 16:57
수정 2024-09-10 21:16

그룹사운드 잔나비가 10년간 거쳐온 작업실의 온도는 뜨겁게 끓어오르다가도 때론 뭉클할 정도로 따뜻했다. 사람들 마음속 깊은 한 부분을 건드는 순수한 '음악의 힘'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건 이들이 서 있는 무대일 테다. 잔나비의 음악과 이야기로 펼쳐낸 3시간 길이의 영화 같은 공연. 그 끝에는 어떠한 잡념도 남아있지 않았다. 황홀한 '잔나비 효과'다.

잔나비(최정훈, 김도형)는 지난달 31일~9월 1일, 지난 7~8일 총 4회에 걸쳐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콘서트 '판타스틱 올드 패션드 2024 : 무비 스타 라이징(FANTASTIC OLD FASHIONED 2024 : MOVIE STAR RISING)'을 개최했다.

데뷔 10주년을 맞아 개최한 이번 공연은 잔나비의 10년 발자취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짜임새 있는 구성과 풍성한 세트리스트로 오랜 시간 응원해 온 팬들의 만족도를 높였다. 클래식하고 아날로그적인 감성으로 대표되는 그룹인바, '영화' 콘셉트 역시 60~70년대 흑백 스크린을 활용해 몰입감을 높였다.

붉은색 막 뒤로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우렁찬 기합이 들려오자 객석에서도 설렘 가득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막이 오르자 주황빛 스탠드에 밴드 악기, 색소폰, 퍼커션까지 마치 올드무비 속 고즈넉한 재즈바를 연상케 하는 무대가 나타났다. 클래식한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잔나비는 '꿈과 책과 힘과 벽'으로 오프닝을 열었다. 무대 뒤 스크린에는 이들의 지난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가사, 최정훈의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시작부터 컨페티가 터지며 관객들에게 강력한 위로의 에너지를 전달했다.

오프닝에서만 무려 6곡을 달리며 장내를 뜨겁게 달군 잔나비였다. '서프라이즈(Surprise)!', '투게더!'로 단숨에 분위기를 전환하며 관객들을 열광케 했고, '더 시크릿 오브 하드 록(The Secret of hard rock)'으로는 록 스피릿 가득한 강렬한 에너지로 혼을 쏙 빼놨다. 김도형의 화려한 기타 플레이에 객석에서는 우렁찬 함성이 쏟아지기도 했다.

'사랑하긴 했었나요'에서는 관객들의 힘찬 떼창과 응원법이 무대를 함께 완성했다. 의자 위에 올라가 지휘하듯 팬들의 호응을 유도하고 소통하는 최정훈의 모습은 흡사 마에스트로와 같았다. 관객들은 그의 손짓에 따라 몸을 좌우로 흔들며 거대한 물결을 일으켰다. 환상적인 무대만큼이나 환상적인 상호작용이었다.

오프닝만으로 최정훈의 셔츠는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관객들 역시 연신 손으로 부채질하며 그와 같이 땀을 흘렸다. 최정훈은 "오늘 완전히 미쳤다"며 관객들의 호응에 감탄했다. 김도형은 "텐션이 정말 미쳤다. 우린 내일이 없다. 다 불태우고 가겠다"고 외쳤고, 최정훈 역시 "위아래 파자마를 입고 공연장에 왔다. 그 말인즉슨 그대로 실려서 가겠다는 말"이라고 해 팬들의 환호를 자아냈다.


잔나비 공연을 한 단어로 정의하긴 다소 어렵다. 다채로운 구성, 틀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느낌 그 모든 게 잔나비의 색깔을 대변한다. '중경삼림' OST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을 부른 데 이어 재치 있는 가사가 돋보이는 '홍콩'을 선보일 때는 최정훈이 일렉 기타를 치고, 김도형이 노래를 부르는 깜짝 이벤트로 재미를 선사해 박수받았다.

스테디셀러 곡 '쉬(She)'는 더 로맨틱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편곡해 황홀한 분위기를 배가했다.

잔나비는 가요계 음유시인으로 불린다. 이들의 섬세한 표현력은 가사만으로 광활한 이미지를 펼쳐내는 능력을 지녔다. '신나는 잠'에서 '나쁜 꿈', '소년 플레이 피전'까지 이어지는 구성은 단단하고 격렬한 밴드 사운드에 넋을 놓게 됐다. 관객들이 무대 위로 보내는 박수, 환호, 움직임은 공연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였다. '새 어둠 새 눈', '위시'에서 동요 '파란마음 하얀마음'으로 이어지는 구간에서는 관객들도 숨죽이고 무대를 바라볼 정도로 놀라운 흡인력을 자랑했다.

'전설', 고(故) 김민기의 '봉우리', '외딴섬 로맨틱'까지 부르고 난 뒤에는 긴 여운에 관객들이 "잔나비"를 연호하기도 했다.

무대 위아래가 편안하고 오붓하게 소통하는 건 잔나비 공연의 특징이자 강점이었다. 잠실실내체육관으로 공연장이 넓어졌어도 마치 이들의 작업실에 들어가 이야기를 듣는 듯 안온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최정훈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메들리를 선보였고, 김도형과 함께 '나의 기쁨, 나의 노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가 탄생한 과정을 상황극으로 보여주며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다. 최정훈이 환복하러 간 사이 김도형은 "신나게 한 곡 바치겠다"며 마이크를 잡고 열창해 박수받기도 했다.


공연의 끝은 미친 듯이 뛰어노는 곡들로 꾸몄다. '굿 보이 트위스트', '꿈나라 별나라', '알록달록', '정글', '작전명 청춘'까지 현장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최정훈은 화려한 발재간을 선보이며 무대를 휘젓고 다녔고, 팬들은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점프하며 쩌렁쩌렁한 박수와 떼창을 쉼 없이 무대 위로 보냈다. 공연이 끝날 때쯤엔 관객들의 옷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공연을 마치며 최정훈은 "인생 통틀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면서 "(데뷔한 지) 10년이 지났다. 짧다면 짧은 기간인데 체감상 길었다. 여러분 덕에 하루하루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말 감사하다. 여기 있는 모두에게 좋은 일들만 있길 간절하게 기도한다"고 말했다.

이어 "페스티벌장에서 만나던 사람들과 잔나비만의 공간으로 꾸며진 곳에서 만나니까 집에 초대한 기분이 든다"면서 "매년 여름이 지날 때면 '이번이 제일 뜨거웠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니 그만한 행복이 없더라. 내년, 내후년 매 여름이 뜨겁고 지나고 나면 '아 여름이었다'라고 생각하길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잔나비는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 없지만'에 이어 신곡 '라이프 고즈 온'까지 공개하며 여름밤의 끝을 소박한 듯 찬란하게 수놓았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