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함께 일했던 직장 선배가 자신에게 저지른 태움(괴롭힘)을 9년 후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폭로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간호사가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 판단을 받았다. 최근 직장 내 괴롭힘 등과 관련해 익명 커뮤니티 등을 통한 폭로가 빈번한 가운데, 대법원은 직장 갑질이나 성희롱 폭로가 다소 지연되거나 부정확한 경우에도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해석을 잇달아 내놔 눈길을 끈다. ○"나를 태운 간호사 교수 됐다"...9년 지난 '복수'A씨와 선배 간호사 B는 2012년 6월부터 2013년 7월까지 충청권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함께 근무했다. 이후 B는 다른 지역의 한 전문대학 간호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그런데 9년이 지난 2021년 3월 A씨는 한 간호사 온라인 커뮤니티 ‘너스케입’에 "9년 전 저를 태운 7년 차 간호사가 간호학과 교수님이 됐다"는 제목으로 B 교수에 대해 글을 올렸다. ‘태움’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으로 선배 간호사가 신입 간호사를 가르치는 과정서 괴롭힘 등으로 길들이는 행위를 말한다.
A씨는 해당 글에서 B로부터 폭언·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A씨는 "(B는) Chest potable(스스로 거동 못하는 환자의 엑스레이를 찍기 위한 기계) 앞에서 보호 장비를 벗고 서 있게 시키면서 '방사능 많이 맞아라' 낄낄거리고 주문을 외시던 분"이라며 직격했다. 그 외에 “다른 동기들은 살 빠지는데 혼자 찐다고 엄청나게 괴롭혔다”, “무릎 뒤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기도 했다” "기저귀를 갈고 있는 자신을 환자의 대변 쪽으로 밀어 넘어뜨렸다"는 주장도 펼쳤다.
B 교수가 A씨를 고소하면서 검사는 허위 사실 기재에 따른 명예훼손 혐의로 A씨를 기소했다.
하지만 지난 5월 서울동부지법은 A씨에게 "허위 사실을 게시해 비방을 할 목적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1심 무죄 판결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검사는 "간호사는 엑스레이 촬영 시 보호장비를 착용하지 않으므로 글 내용은 허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A는 수사기관에서 ‘방사선사는 납가운을 입고 오지만 간호사들은 없기 때문에 보통은 벽 뒤로 숨는데, B와 동료들은 벽 뒤에 숨어서 웃고 나에게는 거기 서 있으라고 했다’는 등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비슷한 시기에 근무했던 다른 간호사가 ‘(B 교수가) A가 일하는 중 potable 촬영 시 피하게 해주지는 않았다"며 "신규 간호사로 실수가 잦은 A가 이를 피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사실 확인서를 작성한 점도 증거로 인정됐다.
검사는 A씨의 진술 사실 일부가 정확하지 않은 점을 들어 "피해자가 A를 환자 대변 쪽으로 민 사실이 없고, 폭행한 적도 없다"며 허위라는 취지로 기소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대변 쪽으로 민 상황에 관해) 구체적이고 자세히 진술했다"며 "세부적으로 다르거나 과장됐더라도 허위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이를 바탕으로 재판부는 “A씨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진술했고 동일 피해를 봤거나 전해 들었다는 댓글 등에 비춰 폭언·폭행 등을 당한 것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A씨의 '비방의 목적'도 부인했다. 법원은 "피해자 B는 간호학과 교수로 사인이라 볼 수 없다"며 "과거 간호사들에게 폭언·폭행 등 가혹행위를 했는지 여부는 후학을 양성할 자격이 있는지와 관련 있는 공적 관심 사안"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A가 우선 간호사들의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고 (같은 직종 사람들이) 댓글을 통해 제보하거나 태움 악습을 공론화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지지를 표명했다"며 "게시글 내용이 순수한 사적 영역으로 볼 수 없는 점 등을 보면 A씨가 허위 사실을 적시했거나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판단하고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해당 항고심 판결은 최근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되면서 A씨의 무죄는 최종 확정됐다. ○'퇴사 후 갑질 폭로' 빈번...인사담당자들 "꺼진 불도 다시 봐야"최근 선고된 일련의 대법 판결은 사실관계에 다소 오류가 있거나 시간이 한참 지난 이후의 폭로에 대해서도 '공공의 이익'을 인정하는 추세다.
대법원은 퇴사 1년 뒤 자신이 다녔던 스타트업 회사 대표의 직장 내 갑질을 비판하는 글을 SNS에 게재해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 직원에 대해 “공공의 이익은 특정한 사회집단이나 그 구성원 전체의 관심·이익에 관한 것도 포함된다”며 “소위 ‘직장 갑질’이 소규모 기업에도 존재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한 바 있다.
또 자신에게 문자 등으로 치근덕대던 상사의 행동을 1년 5개월 후 전국 208개 매장과 본사 소속 직원 80명에게 이메일을 보내 폭로한 것도 무죄라고 판단한 바 있다.
온라인 폭로 등 공개된 채널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익숙한 MZ세대와 발달한 SNS 공간에 대해 회사의 인사 노무 대응이 더욱 철저하고 기민해져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사고 발생 즉시 정확한 대응도 중요하다. 사건 발생을 확인했다면 철저한 조사를 하고 그에 걸맞은 징계나 보상 등 충분히 조치를 해놔야 한다. 당장 피해자를 조용히 시켜도 추후 퇴사 이후 문제로 삼는 사안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조직 구성원들에게 충분히 알리고 투명하게 대응하는 것도 필요하다. 당장 막으려다 소문이 SNS 등에서 일파만파 퍼지면 추후 채용이나 HR 운영 등에 인사팀이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의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