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서울의 한 상위권 대학을 졸업한 취업준비생 김상우 씨(28)는 대기업 채용 서류 심사에서 줄줄이 탈락했다. 그는 “대학 생활 동안 학점과 영어점수를 높였고, 각종 공모전 등 스펙을 쌓았지만 막상 구직을 희망하는 인사 관련 직무 경험이 없어 계속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학벌·학점과 같은 전통적 스펙이 아니라 실무·직무 역량을 강조하는 채용 문화 변화에 청년 구직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업이 원하는 경험은 구체적인데, 이를 쌓을 기회는 절대적으로 부족해서다. 최근 경기 침체로 주요 기업이 신입 공채까지 줄이면서 청년들의 구직 의지가 꺾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5일 비영리재단인 교육의봄이 지속가능보고서를 발간한 국내 154개 주요 기업을 분석한 결과, 36곳(23.4%)이 지원자의 출신 학교 등을 보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을 명문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4~5년 새 대기업과 금융권을 위주로 블라인드 채용이 확산하기 시작했고 취준생의 출신 학교와 학점, 영어점수, 수상 경력보다는 실무 및 직무 역량을 최우선으로 보는 채용이 활발해졌다. 대기업 인사업무 담당자 A씨는 “채용 규모가 줄어 ‘다 잘하는 사람’보다 ‘해당 직무를 잘하는 사람’을 뽑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은 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인재를 선발하려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 경험’, ‘직무와 관련해 보유한 지식’ 등을 묻는다. 직무 경험은 구체적일수록 좋은 평가를 받는다. 전문 분야 자격증과 해당 분야 인턴십 등이 학벌, 스펙보다 유리하다는 게 인사 담당자들의 설명이다.
문제는 직무 경험을 쌓을 체험형 인턴 기회 자체가 매우 한정적이라는 점이다. 일부 공기업만 체험형 인턴을 운영할 뿐 대기업 대부분이 ‘채용 연계형 인턴’을 뽑고 있다. 지난 2월 졸업한 취준생 B씨는 “얼마 전 인턴 면접에서 실무 경험을 묻길래 속으로 ‘경험을 쌓으러 왔는데’라고 생각했다”고 허탈해했다.
구직자들의 무력감도 커지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 7월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15~29세 청년층 가운데 중대한 질병이나 장애가 없지만 막연히 ‘쉬고 싶다’고 답한 인구가 전년 동월 대비 10.4% 증가한 44만3000명으로 2003년 조사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직무 경험을 쌓을 기회조차 갖지 못한 청년들의 무기력증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희원 기자 toph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