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은 지난 2일 서울 장충동 사무실을 찾은 기자와 악수하자마자 “이걸 먼저 봐주셔야 한다” 손을 잡아끌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유라시아 대륙 횡단길 지도’ 였다.
태 처장은 벽면을 가리키며 “목포·부산이 대륙 철도의 기점이 돼 유럽 끝까지 연결되는 이 그림이야 말로 바로 미래의 통일 대한민국 모습”이라며 강조했다. 그는 “통일은 세계로 뻗어나갈 절호의 기회”라며 “김정은이 적대적 국가론을 들고 나왔다고 해서 우리마저 통일의 불씨를 꺼트리면 안된다”고 열변을 토했다.
통일 화두로 목청을 높인 이유를 묻자 “한반도 상황이 안타까워서”라고 답했다. 그는 “통일 한국이 되면 사회주의 일당체제 국가인 중국은 자유주의 국가를 국경을 통해 바로 맏닿게 돼 위기감을 느낄 것이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동원할 무기를 공급받지 못할 것”이라며 “주변 강대국이 ‘하나 된 한국’을 부담스러워 할 정도로 통일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미래”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달 2일 윤석열 대통령으로부터 차관급인 민주평통 사무처장으로 임명돼 직무를 수행한지 한 달여가 됐다. 북한 외교관 신분으로 주영국북한대사관 공사로 일하다, 영국 공군이 지원한 비행기를 타고 탈출한 후 한국에서 국회의원까지 지낸 그의 이력은 명성을 얻었다. 태 처장은 “한국에서 가정의 행복을 맛보고 있다”며 “저 뿐 아니라 아내(오혜선 씨)는 이화여대 석사를 따고 에세이 <런던에서 온 평양여자> 를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을 만큼 많은 것을 이뤘다”고 한국 생활 소회를 밝혔다.
민주평통은 통일 정책을 대통령에게 자문하고 대국민 통일 인식 제고를 위해 1981년 만들어진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다. 국내·외에 2만2000여명이 자문위원으로 위촉돼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태 처장은 “민주평통은 예산을 통해 국민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행정을 하는 집행기구가 아니다보니 잘 알려져 있지 않다”며 “통일만큼 좌 우 이념대립이 극심한 이슈가 없다. 이런 남남갈등을 극복하고 통일 국론을 하나로 모으는 여론 플랫폼으로 민주평통이 활약하게끔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지난 8·15 광복절 79주년 경축식에서 제시한 ‘통일 독트린’에 대해서도 “이제 찬반 의견을 활발하게 교환하며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이어 “오물풍선이 우리 집 앞마당으로 날아오고 북한과 러시아가 밀착하는 상황에서 통일 담론은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말했다.
현 정부가 탈북민을 살피는 일에 매우 공을 들이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차관급인 민주평통의 기관장으로 북한 관료조직에 있었던 저를 임명한 것은 북한 주민도 우리 국민임을 분명히 한 것"이라며 "탈북민을 '먼저 온 통일'이라고 인식하고 통일정책 수립 초기단계부터 이들 의견을 적극 반영해 통일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 처장은 남북한에서 모두 고위관료를 역임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는 “북한 행정조직은 군사화와 상명하복, 서열화가 심하다”며 “김정은과 당 지시를 잘 집행하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언제 총살당할지 모르는 게 북한 고위공무원들의 현실”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북한 외무상과 1부상은 저녁 11시 까지 전화기를 지키며 김정은 불시 전화를 기다려야 하는 신세”라며 "북한 1급 공무원이 주말에 집에서 휴식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상사의 지시가 법에 맞지 않으면 집행을 거부하거나 행정소송까지 할 수 있는 한국과는 비교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양쪽 관료 문화의 차이를 설명했다.
지난해 11월 탈북한 이일규 전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정무참사와 지난달 말 서울에서 만나 ‘소주 한잔’ 을 나눈 일화도 전했다. 태 처장과 이 전 참사는 북한 외무성 근무 시절 함께 일한 동료로 태 처장이 이 전 참사의 선배 격이다.
태 처장은 "제가 북한에 있을 때는 김정은이 외교정책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정도였고 구체적으로 업무파악이나 지시가 없었다"며 “(이일규 전 참사에 따르면) 2019년 2월 빈손으로 끝난 트럼프 김정은 하노이 회담 이후 크게 달라져 요즘은 외무성 문건 하나하나 직접 챙기고 지시하는 등 디테일(세세함)과 그립감(장악력)이 상당하 강해지고 간섭도 매우 심해졌다고 한다”고 그와 나눈 얘기 일부를 전했다.
태 처장의 다음 목표는 그가 탈북 2년여 만인 2018년 냈던 책 <3층 서기실의 암호> 후속작을 내는 것이다. 출간 당시 김씨 일가의 내밀한 사생활과 통치 과정 뒷이야기를 여과없이 담아 주목을 받았고, 지난달 28일 통일부가 예산을 확보해 내년부터 이 책의 영문판을 전 세계 해외공관에 보급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그는 “6년이나 흐른 요즘의 북한 현실을 반영하고 싶다”며 “이일규, 조성길 등 탈북 외교관 동료들과 함께 집필하겠다는 소망이 있다”고 말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