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메모리 반도체 세계 2위인 SK하이닉스에 인공지능(AI) 가속기 기업 A사로부터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5000억원 넘는 선수금을 줄 테니 전용 메모리 반도체 라인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D램을 쌓아 제조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가 AI 가속기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으로 떠오르자 A사가 ‘입도선매’에 나선 것이다. 엔비디아 물량을 대기에도 벅찬 SK하이닉스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업계 고위 관계자는 “AI 시대의 또 다른 주인공이 메모리 반도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반도체업계에서는 ‘메모리 센트릭(중심)’ 시대가 온 것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규격대로 찍어내 저가에 파는 구식 제품.’ 2~3년 전까지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에 붙던 수식어다. 최근 바뀌었다. 2022년 대규모 데이터를 학습하고 이를 토대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생성형 AI 등장과 함께 메모리 반도체는 AI산업의 중심에 섰다. 데이터를 저장하고 이를 그래픽처리장치(GPU) 같은 프로세서에 보내주는 메모리 반도체의 성능이 좋아야 제대로 된 AI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어서다.
높아진 메모리 반도체의 위상은 시장 규모에서 확인된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 테크인사이츠에 따르면 올해 D램과 낸드플래시를 합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1750억달러(약 234조원)로 2023년(914억달러) 대비 91.5%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대만 TSMC가 이끄는 파운드리시장(1203억달러)을 뛰어넘는 수치다. 내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2650억달러로 사상 처음 2000억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관측된다.
기회를 잡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매년 수조원을 설비 투자와 연구개발(R&D)에 투입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경기 평택4공장 건설도 재개했다. 목표는 ‘저장용’이라는 메모리 반도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 성과도 나온다. 프로세서의 영역인 ‘연산(계산)’까지 담당하는 ‘프로세싱인메모리(PIM)’, 서버가 D램을 공유할 수 있는 ‘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CXL) D램’ 등이 대표적이다.
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는 “반도체 역사를 보면 중앙처리장치(CPU)보다 메모리 반도체가 더 빨리 성장했다”며 “데이터양이 점점 더 늘어나는 만큼 메모리 반도체가 연산 등 다양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정수/박의명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