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처음 경험하는 '미술'은 낙서일 것이다. 예술가들이 학교 책상이나 벽에 걸린 낙서에서 영감을 구하곤 하는 이유다. 동심을 나타내듯 단순한 형태로, 또는 의식의 흐름대로 그린 암호 같은 기호로…. 서울 성수동 더페이지갤러리에서 열린 페트릿 할릴라이·정수진 개인전은 두 작가가 각자 해석한 낙서의 변주를 보여준다.
초등학생의 낙서로 바라본 전쟁의 비극
형태가 단순한 쪽은 페트릿 할릴라이다. 코소보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인 그는 이번 전시에 신작 '로야 메 토파(Loya me Topa·공놀이)'를 선보였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캐릭터, 눈사람 등 초등학교 교실의 낙서를 브론즈로 구현한 조각 11점으로 구성됐다. 11명의 선수가 뛰는 축구 경기처럼 활력이 넘치는데, 작품에 담긴 의미는 무겁다.
할릴라이는 1986년 남유럽 발칸반도의 코소보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난민캠프에서 보냈다.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 사이의 분쟁인 코소보 내전 때문이다. 작가는 이때부터 전쟁이 주는 공포를 아이의 시선에서 표현한 드로잉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고향마을 루닉으로 돌아온 건 2012년 무렵이다. 그나마 전쟁 이전의 모습을 간직한 마을의 폐교를 찾았다. 작가는 학생들의 손때가 묻은 녹색 책상과 벤치에 적힌 낙서를 기록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아이들이 느꼈을 꿈과 두려움을 드로잉과 조각, 설치작업 등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번 신작은 작가가 10여년간 추진해온 '아베타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획됐다. 아베타레는 코소보 아이들을 위한 알바니아어 초급 알파벳 교과서다. 이 책이 알바니아계 민족한테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1990년대부터 세르비아의 탄압이 거세졌는데, 이때 알바니아계가 자기들의 문화를 간직하기 위해 보전했던 책이 아베타레다.
전쟁과 동심을 오가는 그의 메시지는 해외 미술관과 미술전에서 여러 차례 주목받았다. 201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코소보 대표작가로 선정됐고, 4년 뒤엔 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을 받았다. 올해 4월부터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루프가든 커미션에 선정돼 그의 아베타레 시리즈를 전시하고 있다.
64개 형상소로 조합한 작가의 무의식
할릴라이가 간단한 형태로 무거운 주제를 전한다면, 한국 작가 정수진은 그 반대다. 그림의 구조가 복잡하지만 담긴 의미는 단순하다. 질서정연하게 짜인 화면 구도 사이로 혼란스러운 상상력이 튀어나온다. 어린아이가 의식의 흐름대로 그린 낙서가 떠오르기도 한다.
신작 22점이 걸린 이번 전시는 '뇌해(腦海)' 시리즈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작가가 '다차원 평면'이라고 부르는 격자 화면엔 이미지가 빼곡히 들어섰다. 인간 두상과 서양 배, 나비 등 수수께끼 같은 대상들을 해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뇌해를 우리말로 옮기면 '생각의 바다', 즉 작가의 머릿속을 그렸다는 얘기다.
미국 뉴욕과 한국에 오가며 활동하는 정 작가는 2000년대부터 실험적인 시각이론을 구축했다. 색과 형상을 만들어내는 의식 구조를 분석한 결과 총 64개의 형상소를 발견했다고 한다. 색, 캔버스의 질감, 도형, 인물 두상 등이 작가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다.
작가의 작품은 이러한 형상소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이들을 화면에 배치하는 과정에 '대우명제'가 작용한다. 대우명제는 작가가 수학적 이론에 기반해 세운 본인만의 그림 방식이다. 캔버스를 채운 기호들이 난립하는 듯 보이면서도 일종의 질서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이해하기 쉬운 전시는 아니다. 작가가 의도한 결과다. 작가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각 음표의 상징적인 의미를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의식이 흘러가듯 즐기길 바란다"고 했다.
두 전시 모두 9월 21일까지다.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