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대 국회에서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은 총 2만3566건으로 역대 최대였다. 16대 국회 당시 1651건에 그쳤던 발의 건수는 20년 동안 14배 가까이 늘어났다. 양은 폭증했지만 법안이 시행됐을 때 가져올 부작용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법안이 남발돼 품질은 갈수록 떨어진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국회에 ‘입법영향분석’을 도입해 무분별한 규제 양산을 막고 과학적인 입법 환경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28일 국회에서 나왔다. ○“사회 변화 반영한 입법 요구”
국회입법조사처는 이날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더 좋은 법률과 입법영향분석: 각계가 말하다’를 주제로 공동 세미나를 열었다. 박상철 국회입법조사처장은 개회사에서 “의회주의와 법치주의가 성숙한 유럽의 많은 국가는 영향 분석을 거쳐 법을 제정하는 것이 이미 보편화돼 있다”며 “우리 국회도 입법영향분석을 통해 과학적이고 근거에 기반한 입법 활동을 본격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입법영향분석은 법안이 국민과 사회에 미치는 각종 영향을 객관적·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이날 세미나엔 경제계, 노동계, 학계 등에서 17개 기관과 학회가 참여했다. 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은 “과거 인터넷 실명제법이 통과된 이후 결과적으로는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 업체들이 유튜브 등 해외 기업들에 역차별당하는 문제가 있었다”고 사례를 들었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디지털·인공지능(AI) 패권 경쟁 시대에는 법을 잘 만드는 것도 힘들고, 이 법이 우리 사회 경제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조사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라며 “그럴수록 법률이 가져올 수 있는 영향을 예측하고 잘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구용 한국상장사협의회 회장은 “기업들이 상법, 자본시장법, 외부감사법 등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은 완성도 떨어지는 입법안에 대응하느라 시간과 인력을 들여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도 “졸속 규제에 중소기업은 훨씬 크게 타격받는다”고 토로했다.
일각에선 입법영향분석이 의원의 입법권을 제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대해 이순태 한국법제연구원 부원장은 “입법권 제한 문제는 선행 연구에서 사실이 아니란 결론이 충분히 나왔다”며 “의원들도 입법권 보완 수단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원 반발에 무산된 입법영향분석주요 선진국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입법영향분석을 시행 중이다. 영국은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규제정책위원회에서 정책개발단계부터 사후단계까지 총 6단계에 걸쳐 입법 과정의 분석과 평가를 실시한다. 독일도 국가규범통제위원회를 통해 사전·병행·사후 등 3단계로 입법영향분석을 한다.
사전 규제영향평가가 의무화된 정부 발의 법안과 달리 의원입법은 절차가 허술하다. 의원 10인 이상의 동의만 있으면 발의가 가능하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도 입법영향분석을 의무화한 법안이 수차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입법권이 제한된다는 의원들의 반발에 밀려 번번이 무산됐다.
22대 국회에서도 윤재옥 국민의힘 의원과 박성준·부승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관련 법을 발의했다. 윤 의원안은 의원이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규제’를 신설·변경·폐지할 때 입법영향분석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는 내용을 담았다. 박 의원안은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법률안’을 발의할 때 입법조사처에 입법영향분석을 요구하도록 했다.
설지연/배성수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