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8월 29일 14:55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사모펀드(PEF) 운용사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의 크레딧 사업을 놓고 엇갈린 평가가 나온다. 유동성 위기를 겪는 기업에 급전을 꿔주는 '구원투수'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기업이 궁지에 몰릴 경우에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냉정하게 기존 계약 이행을 요구한다는 부정적 의견도 적잖다. KKR이 위기를 노리는 하이에나 전략으로 한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메리츠 대신 KKR 찾아간 태영그룹 29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IMM컨소시엄에 에코비트 지분 100%를 매각하는 주식매매계약을 맺은 티와이홀딩스와 KKR은 매각 대금이 들어오면 티와이홀딩스가 KKR에 빌린 4000억원부터 먼저 정산하기로 했다. 티와이홀딩스가 지난해 초 KKR에 4000억원 규모의 사모사채를 발행하면서 자사가 보유한 에코비트 지분 50%를 담보로 걸었기 때문이다. 채무를 상환하고 남은 금액은 KKR과 티와이홀딩스가 차등 배분한다.
4000억원을 빌리기 위해 기업가치가 2조~3조원에 달하는 회사의 지분 50%를 담보로 거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당시 태영그룹의 상황을 돌아보면 납득이 가는 조건이다. '레고랜드 사태' 직후라 자금시장은 얼어붙었고, 유동성 위기를 맞은 태영건설에 수천억원을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금융회사도 없었다.
태영그룹은 KKR에 앞서 메리츠증권을 찾아가 자금조달 협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건설 위기로 자금 조달이 급한 롯데그룹이 메리츠증권으로부터 1조5000억원을 조달한 사례가 있어 메리츠증권이 태영그룹에도 구원투수로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양측의 협상은 결렬됐다. 협상이 결렬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태영그룹은 메리츠증권과 자금 조달 협상을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IB업계 관계자는 "연 13%의 금리에 4000억원을 빌려주면서 에코비트 지분을 담보로 잡고, 몰취 조항을 넣어 담보자산까지 노린 것은 KKR 크레딧펀드의 냉혹함을 볼 수 있는 사례"라고 말했다.
KKR에 손 벌린 SK그룹도 위기KKR의 냉혹함은 SK그룹과의 거래에서도 포착된다. SK E&S는 2021년과 지난해 KKR을 대상으로 상환전환우선주(RCPS) 3조1350억원어치를 발행했다. RCPS의 기초자산은 SK E&S의 도시가스 자회사 7곳으로 설정했다.
SK E&S이 SK이노베이션과의 합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 RCPS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회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면서 KKR은 RCPS의 상환 기간이 도래하기 전 먼저 상환을 요구할 수 있게 됐다. RCPS 3조원어치를 상환할 여력이 없는 SK E&S는 기초자산인 도시가스 사업을 그대로 KKR에 내줄 위기에 몰렸다.
SK E&S는 연 7.5~9.5%로 설정된 RCPS의 보장 수익률을 연 9.9%로 올려주기로 하고 KKR의 RCSP 상환 요구를 막았다. 고비는 넘겼지만 보장 수익률이 올라가 향후 SK E&S가 지게 될 재무적 부담은 더 커졌다. 현금 상환을 하지 못하면 KKR에 도시가스 사업을 넘겨야 하는 처지도 그대로다.
최근에는 국내 PEF 운용사 VIG파트너스가 KKR 크레딧펀드의 손을 잡았다. 프리드라이프 매각 작업이 지연돼 골치를 앓던 VIG파트너스는 매각 작업을 진행하는 중에 KKR에 소수 지분을 넘겼다. 펀딩을 진행 중이었던 VIG파트너스는 출자자(LP)에게 보여줄 회수 성과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런 이례적인 딜을 감행했다. 대신 딜 구조는 KKR에 유리하게 설정됐다. KKR은 주주 간 계약으로 태그얼롱(동반매각참여권)을 받았다. 우선주 형태로 투자해 향후 프리드라이프 매각이 성사되면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률도 보장받았다. 보장 수익률은 두 자릿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평판 리스크 커진 KKR 크레딧 투자를 할 때 자금 공급 조건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보장 수익률을 받고, 담보를 요구하는 건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KKR은 태영그룹과 SK그룹의 곤란한 처지를 악용해 무리한 요구를 관철했다는 점이 시장에서 논란이 됐다. 그룹의 핵심자산을 담보로 잡거나 과도하게 높은 금리를 요구하면서 KKR이 위기를 노리는 하이에나라는 평가를 자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KKR도 이 같은 평판 리스크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과거에는 기업들은 사실상 대출성 자금 조달을 하면서도 글로벌 PEF인 KKR로부터 투자금을 유치했다는 식의 포장이 가능했다. 하지만 KKR이 위기를 노리는 하이에나라는 인식이 퍼지면 KKR로부터 자금을 받은 게 시장에서 오히려 위험 신호로 읽히게 된다.
KKR이 에코비트를 몰취할 수도 있었고, SK E&S에 상환을 요구해 도시가스 사업을 모조리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한 발짝 물러선 것도 국내 자본시장에서 평판을 챙기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IB업계 관계자는 "KKR이 일단 발톱을 감췄지만 선관주의 의무에 따라 KKR도 절대 손해 보는 거래를 할 순 없는 만큼 구체적인 계약 조건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KKR 크레딧펀드가 한국에서 짭짤한 수익을 거두자 크레딧펀드에 강점이 있는 글로벌 PEF들이 앞다퉈 한국 시장에서 사업을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글로벌 최대 크레딧 투자사 중 한 곳인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가 대표적이다. 아폴로는 최근 삼성증권 출신 이재현 부사장 영입을 결정하고, 국내 투자 인력을 10명가량 채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