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간경화로 투병하던 60대 환자 A씨. 그는 지난달 말 서울아산병원에서 뇌사자 간을 이식받았다. 8시간 넘는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그에게 사회복지팀은 의료비 지원기관을 연결해줬다. 소득이 적어 2000만원 넘는 치료비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환자를 외면할 수 없어서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이 병원은 최근 정부의 재정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소속 교수 일부가 무기한 휴진을 선언했다’는 이유에서다. 의료 현장 상황을 고려한 정책적 배려가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8개 병원 1241억원 못 받아
23일 의료계에 따르면 정부에 7월분 건강보험료 선지급 지원을 신청했다가 거부당한 병원은 8곳이다. 서울아산병원과 강릉아산·울산대병원, 연세대 세브란스·강남세브란스병원, 고려대 안암·구로·안산병원 등이 1241억원을 못 받았다.
정부는 의료기관 신청을 받아 지난해 6~8월 건강보험 급여 매출의 30%를 올해 6~8월 우선 지급하고 있다. 내년에 정산하는 방식으로 자금 흐름에 숨통을 터준다는 취지다.
6월분은 62개 병원이 3600억원을 받았다. 7월분을 못 받은 8개 병원과 충북대병원 등 9곳이 6월분 지급 대상에서 빠져 당시 1041억원을 못 받았다. 2월 전공의 이탈 직후 주요 대학병원 적자 규모가 하루 15억~30억원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큰 규모다.
보건복지부는 의료 수입 감소와 필수의료 유지를 위한 자금 차입 등을 지원 조건으로 달았다. 중환자 진료도 줄여선 안 된다. 병원들은 조건을 충족했다고 주장했다. 한승범 고려대 안암병원장(상급종합병원협의회장)은 “의료진 피로도가 한계치를 넘었지만 고려대 안암·구로·안산병원 등의 의료진은 모두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 환자 곁을 지키고 있다”며 “선지급이 보류돼 당혹스러운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휴진은 선언 불과…정상 진료 중”정부도 사정은 있다. 이들 병원 소속 교수들이 ‘무기한 휴진’을 선언했기 때문에 필수의료를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교수의 ‘선언적 발언’을 두고 정부가 지나치게 대응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자존심 싸움’보다 실질적 지원책을 마련할 때라는 것이다.
병원들은 교수 휴진 전후 큰 변동 없이 진료를 이어가고 있다. 고려대의료원은 최근 전신 40% 이상에 화상을 입고 고통받던 마다가스카르 소녀를 수술해 새 삶을 선물했다. 경기권 응급실 가동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밀려드는 응급 환자를 돌보기 위해 세브란스병원은 60대 이상 의료진까지 당직 근무에 동참하고 있다. 이강영 세브란스병원장은 “세브란스·강남세브란스병원 모두 휴진 없이 진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중증 환자 비율이 높기 때문에 휴진은 있을 수도 없다”고 말했다.
서울아산병원도 전공의 공백을 메우는 교수들의 당직 부담이 커지자 일부 개인 휴가가 늘었지만 집단 휴진 전후로 외래 진료 세션 등은 바뀌지 않았다. 박수성 서울아산병원 기획조정실장은 “중증 환자와 응급환자 등 필수의료를 중심으로 모든 진료과가 정상 진료하고 있다”며 “교수 휴진 선언 전후 중환자실 이용률, 중증 환자 수술 건수 등은 차이가 없다”고 했다. 그는 “남은 의료진 사기를 높이고 경영난을 헤쳐가기 위해 선지급 지원이 절실하다”며 “병원 경영난이 장기화하면 관련 산업계까지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