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월가에서 인공지능(AI) 시장에 대한 경고음이 높아지면서 국내 증시에서 반도체 대표주자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 역시 힘이 빠진 모습이다. 여의도 증권가에서도 반도체 과열론과 함께 관련주 비중을 줄이라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다. 하지만 정점을 논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2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전날보다 600원(0.77%) 밀린 7만7700원에 장을 마쳤다. SK하이닉스는 5600원(2.93%) 하락한 18만5500원에 거래를 끝냈다.
지난 2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증시에서 엔비디아를 비롯한 반도체 종목들의 주가가 줄줄이 하락한 영향이다. 엔비디아(-3.7%)와 AMD(-3.87%), 퀄컴(-3%) 등이 일제히 밀리면서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도 3.44% 하락했다.
최근 한 달간으로 시야각을 넓히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 부진은 추세적이란 점이 확인된다. 해당 기간 양사 주가는 각각 6.39%, 9.51% 밀렸다.
다음 주 증시 핵심 변수들이 포진한 만큼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위험자산을 줄이려는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엔비디아가 오는 28일(현지시간) 2분기 실적을 내놓을 예정인 가운데, 잭슨홀 연례 경제심포지엄을 앞두고 경계심이 커졌다. 간밤 잭슨홀 연례 경제심포지엄에서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은 피벗을 사실상 공식화했다. 그는 기조연설에서 "정책을 조정할 시간이 도래했다"며 "우리의 여정은 방향이 명확하다"고 밝혔다.
경기 둔화에 따른 반도체 사이클 고점 우려도 두드러졌다. 경기 침체 불안이 커지는 만큼 '돈 못 버는' AI 투자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다. AI 시장은 비용은 많이 들지만 그만큼의 수익성을 못 끌어오는 '돈 먹는 하마'일 수 있단 게 비관론자들의 논리다.
외국계 증권사 모건스탠리는 지난 20일 '반도체 업황 고점을 준비하라'(Preparing for a peak)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모건스탠리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매출 증가율이 올 3분기(21%)에 고점을 기록하고 4분기부터는 18%로 떨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기업의 클라우드 투자비 증가율도 3분기(59%)가 고점일 것으로 예상했다. 모건스탠리는 "AI산업 투자 랠리는 영원하지 않다"며 "결국 반도체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짚었다.
국내 증권가에서도 '고점이 임박했다'는 의견과 '고점론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팽팽히 대립 중이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이달 들어 두 번의 보고서를 통해 'AI 거품론'과 '반도체 업황 고점론'은 시기상조라고 강조했다. 김 연구원은 "엔비디아가 전 세계 점유율의 97%를 차지하고 있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은 2029년까지 연평균 39% 성장해 약 360조원에 이를 전망"이라며 "AI 학습 분야에서 엔비디아를 대체할 제품이 없고, 선두 업체가 없는 추론용 AI 반도체 시장은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들이 주도권 확보를 위한 AI 투자를 수년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사이클의 고점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그는 "3분기 현재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의 재고 수준, 설비투자 증가율, 영업이익률 등이 과거 대비 절반 수준에 불과해 반도체 사이클의 고점 시그널을 찾을 수 없다"며 "오히려 지금처럼 우려로 투자심리가 바닥일 때 반등이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해 '바이 앤 홀드' 전략을 권했다. 갖고 있지 않은 상태면 매수하고, 이미 보유 중이면 팔지 말라는 얘기다.
김영건 미래에셋증권 연구원도 "AI 기술 관련 빅테크의 투자가 견조한 만큼 반도체 사이클은 더 연장될 것으로 본다"며 "아직은 '피크아웃'(고점 후 하락)을 논하기엔 이르기 때문에, 비중을 줄일 필요가 없어 보인다"고 짚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즈(FT)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마이크로소프트와 아마존, 메타, 알파벳의 AI 관련 투자는 약 144조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0% 증가했다.
반면 매도 시점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민희 BNK투자증권 연구원은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들이 대규모 AI 투자를 지속하겠다고 했지만, 과거 클라우드 사례를 보면 올 연말 이후에는 투자 속도를 조절할 가능성이 높다. 초도 비용이 계속 유지될 수도 없는 데다 수익도 안 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연구원은 "추세적으로 반등은 어렵다고 보기 때문에 반도체 비중을 계속 줄여나가기를 권한다"고 조언했다.
신민경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