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데코 녹아든 도쿄 미술관…90년前 학살자의 대저택이었다

입력 2024-08-22 17:17
수정 2024-08-23 03:02

도쿄도 정원미술관(사진)은 벨 에포크 시기 프랑스와 일본의 친밀한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도쿄에 자리한 이 미술관은 1933년에 지어진 본관과 1960년대에 신축돼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별관, 그리고 유럽식과 일본식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 본관은 일본의 황족이던 아사카노미야 가문에서 사용한 대저택이었는데, 내부를 온통 아르데코 스타일로 디자인한 서양식 건축물이다. 저택을 건설한 시기에 프랑스의 실내 장식가, 공예가, 조각가를 일본으로 불러들여 작업을 맡긴 것은 아사카노미야 가문의 재력과 위세를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아르데코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된 시기에 등장했다. 그전에 유행했던 장식 스타일은 아르누보인데, 꽃이나 나무와 같은 식물 문양에서 영감을 받아 유기적인 형태의 패턴과 곡선적인 요소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복잡한 모양새의 디자인 덕에 아르누보 미술품은 수공으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기계를 통한 대량생산이 일반화됐다. 여기에 맞춰 곡선보다는 직선적인 요소가, 유기적인 형태보다는 기하학적인 조형이 장식품 디자인에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르데코는 산업화 시대에 적합한 양식이었던 셈이다.

이 같은 아르데코 미술의 경향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최초의 행사가 1925년 파리에서 열린 ‘현대 장식 및 산업 미술 국제 박람회’다. 이 박람회에는 건축, 실내 장식, 가구, 유리 공예, 보석 등이 전시됐다. 갤러리 라파예트 같은 파리의 유명 백화점도 박람회장에 개별 파빌리온을 마련하고 진귀한 장식품들을 선보였다. 건축과 장식 미술을 처음으로 집중 조명한 이 박람회를 계기로 장식 미술을 뜻하는 프랑스어 ‘아르 데코라티프’가 등장했고, 이후로는 이를 줄인 ‘아르데코’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건축 양식과 디자인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 이 행사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람객이 몰려들면서 7개월간 열린 박람회의 방문객 수는 1600만 명에 육박했다.



이 박람회를 관람한 일본인 관람객 중에는 아사카노미야 가문의 야스히코 왕도 있었다. 그는 일본의 육군 소위로 임관해 복무하다가 1922년 프랑스의 특수군사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얼마 후 자동차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된 그를 간호하기 위해 부인도 프랑스로 오게 된다. 두 사람은 1925년까지 파리에 함께 머물면서 그해에 열린 ‘현대 장식 및 산업 미술 국제 박람회’를 관람할 기회를 얻었다. 이 박람회에는 수많은 볼거리가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에밀 자크 루만의 ‘컬렉터의 호텔’과 같은 파빌리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내 장식가 루만은 파빌리온 내부의 벽과 천장을 온통 아르데코 스타일로 장식하고 그에 어울리는 조명과 가구를 전시했다. 가구를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파빌리온이었지만, 실제 집처럼 공간을 꾸미고 그 안에 가구를 전시한 것이다. 이런 전시 방식은 오늘날의 가구 매장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파격적인 시도였다.

컬렉터의 호텔은 아르데코 스타일로 집을 장식하면 어떤 모습일지를 시각화해 보여준 모델하우스나 다를 바 없었다. 1925년의 장식 미술 박람회를 관람한 야스히코 왕 부부는 아르데코 스타일에 매혹됐고, 그해 귀국해 컬렉터의 호텔처럼 실내를 장식한 대저택을 건축할 결심을 하게 된다.

1929년 저택의 건축이 시작됐다. 건물 설계는 황실 건축물을 담당한 궁내성 소속의 건축가들이 맡았다. 실내 디자인은 프랑스인 앙리 라팽의 책임하에 이뤄졌다. 공예가인 르네 랄리크와 막스 앵그랑이 현관의 유리문과 에칭 글라스로 장식된 대형 미닫이문을 만들었다. 철 공예가 레이몽 쉬브는 문과 가구의 철제 장식을 맡았다. 조각가 알렉상드르 블랑쇼는 거실용 대리석 부조 조각을 제작했다.

저택의 장식에 참여한 프랑스 전문가들은 모두 1925년의 장식 박람회에 참여해 명성을 떨친 인물들이다. 그래서인지 1933년 완성된 도쿄 저택은 파리 박람회장의 파빌리온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면 이곳이 일본에 있는 저택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일본 안에 20세기 초의 프랑스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바로 아사카노미야 저택이다.

아르데코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 저택과 그 주인의 운명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일본 패전 이후 야스히코 왕은 황족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평민으로 강등됐고, 저택 역시 정부에 의해 압류됐다. 그가 황족의 지위를 잃게 된 것은 일본이 패전국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야스히코 왕은 1937년 일본군의 난징 공략을 지휘했고, “모든 포로를 사살하라”는 그의 명령은 그해 발생한 난징대학살의 명분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패전 이후 전쟁 범죄 혐의로 조사를 받았으나 황족은 전범재판에서 불기소한다는 방침에 따라 석방됐다. 그의 저택은 이후 총리 관저와 영빈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83년 도쿄도 정원미술관으로 명칭을 바꿔 개관했다. 아사카노미야 저택은 아르데코라는 현대적인 양식을 파격적으로 수용할 정도의 감식안을 지녔던 건축주 야스히코 왕에 의해 탄생했다. 동일인이 난징대학살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이 저택이 지닌 미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극적인 반전이라고 할 수 있다. 도쿄도 정원미술관은 프랑스와 일본, 아르데코와 난징대학살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인 아름답고도 기이한 서사의 공간이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