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인문학자 김시덕의 부동산 임장 동행 르포
“여기를 좀 보세요. 이것이 바로 산업의 현장이며, 삶의 역동 아니겠습니까.”
한낮의 공기가 푹푹 찌던 지난 8월 12일 오후, 허허벌판을 다지는 포크레인을 등지고 김시덕 작가가 말했다. 더위 때문인지, 드넓은 현장에 설레었던 것인지, 그의 얼굴은 상기됐고 목소리는 더욱 빨라졌다.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사 현장이었다. 경기도 남부 반도체 벨트는 김 작가가 책 <대서울의 길>, <한국 문명의 최전선>에서 공통적으로 한국의 미래로 강조한 곳이다.
잠실에서 완성된 강남적 생활양식
김 작가와의 임장은, 그가 최근 내놓은 신간이 계기가 됐다. 2017년부터 본격 답사를 시작하고 도시와 관련된 책을 꾸준히 쓰고 있는 그는 지난 1월 <한국 도시의 미래>에 이어 7월 1일 ‘한국 도시 아카이브’ 시리즈로 총 4권의 책을 냈다. <한국 도시의 미래>는 부동산 투자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끌며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김 작가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는 세 개의 메가시티와 몇몇 소권역으로 집중될 것이다. 인구 감소라는 대세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서울 핵심 지역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으며, 강남을 대체할 곳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중심에 있는 지역이 ‘대서울권’이다. 또한 ‘확장 강남’은 경부선, 한국고속철도(KTX), 수서고속철도(SRT)를 따라 경기도를 넘어 충남 천안·아산까지 다다르고 있으며, 서울 송파구 잠실지구에서 완성된 강남적 삶의 양식이 전국의 신도시로 보급되고 있다. 바로 ‘반도체’를 따라 확장 강남이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이날의 임장은 경기도 평택시와 용인시 일대의 ‘K-반도체 벨트’의 실제를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K-반도체 프로젝트의 초반에서, 경기도 동남부와 충청도 접경 지역이 한국의 미래 먹을거리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인프라를 어떻게 세우고 있는지 중간 점검을 해보는 차원이다. 그 시작점은 평택역이었다. 평택은 반도체 호재가 많은 지역이지만, 미분양 물량이 쌓인 대표적인 지역이기도 하다. 올해 들어 평택에서는 분양 단지 7곳 중 6곳에서 미분양이 발생했다. 경기도 지역 전체 물량의 16.4%에 해당한다.
“요즘 평택 서부 지역이 미분양이라고 하는데, 또 동쪽에 미니 신도시를 짓기로 했어요. 미분양인데 왜 아파트를 짓느냐고 하지만, 둘은 완전히 다른 데거든요. 서평택 아파트가 미분양인데 왜 신도시를 만드냐고 비판하는 것은 은평구가 미분양인데 왜 강남에 아파트를 짓느냐는 수준이에요. 평택이 이렇게 큽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충청도와 경기도가 다 있는 곳인데, 그냥 평택으로 묶어 버리면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죠. 그걸 보시라는 겁니다.”
스토리를 알면 미래의 방향이 보인다
김 작가는 “임장을 할 때 가능한 과거의 이력들을 참고해서 봐야 한다”며 “스토리를 알면 현재와 미래의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택역에서 차를 타고 평택 지제역의 오른쪽 도로를 따라 ‘브레인시티’ 현장을 이르렀다. 평택 브레인시티 개발 사업은 평택시 도일동 일원 482만㎡(약 146만 평) 규모 용지에 2025년까지 4차 산업을 선도하는 첨단산업단지를 비롯해 대학, 주거·상업시설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이정표에 용인이라고 써 있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반도체 클러스터가 나오고, 여기 중간에 공백을 메우려는 게 브레인시티라는 대규모 택지 개발입니다. 7개 산업단지라고 적힌 안내판이 브레인시티의 출발점이에요. 이게 완성되면 송탄과 고덕신도시까지 연결됩니다.”
기사로 접하는 브레인시티와 현장의 느낌은 어떻게 다를까. 경기도 일반산업단지 중 최대 규모답게 길 양쪽으로 광활한 부지를 보며 김 작가는 말했다. “저 동네가 예전에 밤나무도 있고 새마을운동에 꽤 성공했던 마을들이었어요. 그걸 싹 밀고 갈아 엎어서 지금 브레인시티가 한창 조성 중입니다.”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그저 황량한 땅이지만, 답사가의 눈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중첩돼 살아 움직이는 땅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공장은 지어질 것이고, 10년 후에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겠죠.”
새로운 개발 부지는 곧 갈등의 현장이기도 하다. 최근까지, 이곳은 강제 철거 집행 위기가 있었다. 평택시 칠괴동에 위치한 선일콘크리트 공장 부지가 사업 부지로 수용되면서 이곳 임직원들은 “삶의 터전인 공장을 지켜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소를 찍고 방문한 공장 부지는 이미 철거가 진행된 후의 모습이었다.
“많은 분들은 개발 이후에만 관심이 있지만, 저는 투쟁이나 보상 문제를 비롯해 모든 과정을 다 봅니다. 변해 가는 모습, 사람들의 이동 경로 등이 다 관심사입니다. 여기도 지난봄까지만 해도 투쟁이 심각했습니다. 브레인시티의 거의 마지막 허들이었는데, 이게 제거가 됐네요.” 김 작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취수장 놓고 갈등, 진짜 문제는 전기
개발 측면에서 보면 장애물이 사라지면서, 사업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이날 임장에는 김 작가의 답사팀 중 실전 투자가 한 명도 동행했다. 김 작가는 투자가의 의견을 빌려 일부 아파트의 미분양에도 불구하고, 전체 개발 계획은 큰 문제 없이 진행될 것으로 내다봤다. 카이스트 평택캠퍼스가 입주 예정이며, 한 대학병원도 입주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인프라가 부족한 탓에 이곳 브레인시티는 아파트 단지보다 산업 단지로서 더 주목을 끌 것으로 전망했다.
철거 현장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삼성전자 평택캠퍼스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의 평택이 ‘반세권’으로 불릴 수 있는 이유, 김 작가의 표현인 ‘확장 강남’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배경에는 삼성전자가 있다.
김 작가의 안내에 따라 차는 평택시 진위면 ‘송탄 정수장’으로 향했다. 1979년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개발 제한 등 규제를 받고 있던 곳이다. 평택시는 지난 4월 상수원보호구역 해제를 발표했다. “국가 핵심 사업인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송탄 상수원보호구역을 내년 상반기까지 해제하기로 결정했다”고 평택시는 설명했다. 용인 이동·남사 첨단 반도체 국가산단 부지가 송탄 상수원보호구역에 일부 포함되면서 구역 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용인시와 평택시가 오랜 갈등 끝에 합의점에 이른 것이다.
“송탄 취수장은 평택의 동쪽 끝입니다. 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 용인이 개발을 못했어요. 그런데 경기도 남부 반도체 클러스터에 삼성전자가 들어오잖아요. 국가가 사활을 건 사업이라서 울며 겨자먹기로 해제가 됐어요. 이런 갈등이 있는 곳이 또 있죠. 평택 남쪽에 있는 유천 취수장입니다. 압력이 없는 유천 취수장은 해제가 안 되고 있습니다. 험프리스 미군 기지가 명분이 돼 유사시를 대비해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죠. 이것 때문에 안성이 개발이 안 되고 있습니다. 유천 취수장을 놓고 평택과 안성 간의 갈등은 첨예하죠. 소지역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국가 사업들이 패착을 많이 둡니다.”
김 작가는 “송탄 취수원의 경우 팔당 수원지 물을 가져오면 해결되는 거라서 사실 쉬운 문제였다”며 “진짜 문제는 전기”라고 말했다.
지금 산업의 중심은 경기도 남부
물과 전기는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는 데 있어 핵심 인프라다. 물과 전기는 점점 부족해지는 상황에서 인공지능(AI) 열풍 속 반도체 수요는 나날이 늘어 가고 있다. 김 작가는 “이른바 밀양 사태 이후로 송전탑을 못 만들고 있다”며 “최악의 경우 공장마다 옆에 소형원자력발전소(SMR)를 지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 작가의 시선은 농경지와 축사와 공장들이 뒤엉켜 있고, 그 위로 고압 송전탑의 전선이 지나가는 모습에 멈췄다.
취재진은 이어 평택시 고덕동으로 향했다. 일반 지도상에서 보면 푸르스름한 산의 모양으로 보이지만, 구글 위성 지도로 확인하면 산이 아닌 시설물의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설물은 ‘탄약고’다. 각종 폭탄과 탄약 등이 보관돼 있는 곳이다. 고덕신도시 서북부 쪽에는 알파탄약고가 있다. 고덕신도시는 2020년 말 전체 공사를 완료할 계획이었지만, 탄약고 이전이 지지부진해 준공 일자가 5년이나 늦춰진 상태다.
실제로 본 탄약고는 수풀에 뒤덮여 있어, 알고 보지 않으면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 옆으로 학교가 덩그러니 서 있다. 김 작가는 “아파트와 탄약고 사이를 학교가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형태가 됐다”며 “만약 폭파되더라도 충분한 이격거리를 둬서 위험하지는 않지만, 있는 걸 없는 것처럼 말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방문한 ‘고덕변전소’는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충남 화력발전소에서 전기를 받아, 경기도에 공급하는 변전소다. 김 작가는 “전기가 없으면 반도체 공장도 돌 수 없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보면 경기도가 슈퍼 을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건물에 가까워 올수록, 대형 크레인과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 그들이 타고 온 이륜차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형 크레인 작업에 투입될 수 있는 작업자들이 거의 대부분 여기 와 있어요. 이 작업이 끝나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로 갈 겁니다. 지금 산업의 중심은 경기도 남쪽에 있죠.”
한국은 이미 다인종 국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크게 삼성전자가 주도하는 이동·남사읍 일대와 SK하이닉스가 진행 중인 원삼면 일대로 나뉜다. 김 작가는 “삼성전자가 있는 평택은 동쪽으로 개발이 순조롭게 될 것으로 보지만, 용인시 이동·남사읍 일대 사업은 아직 눈에 보이는 현장이 없어 과연 계획대로 될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귀띔했다.
김 작가에게 ‘확장 강남’으로서 유망한 곳이 어디인지 물었다. 그는 “삼성에 다니는 임원들이 아침 7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강남을 포기하고 주요 거점으로 옮기면서 동탄, 광주 등의 지역이 부상했다”며 “고덕신도시는 거리가 있어 미니 신도시가 더 선호될 것으로 보고, 인프라로 보면 지제역 주변으로 아파트 등이 많이 들어와 있다”고 언급했다.
평택에서 용인으로 이동하는 길목에서,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내리 외국인 타운에 잠시 멈췄다. 외국인 밀집 지역도 김 작가가 주목해서 보는 임장 포인트다. 외국인을 빼고 한국의 미래를 말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안성 대덕면 내리에는 안성에서 단일 면적당 외국인이 가장 많은 다문화 지역이다. 특히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출신의 고려인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김 작가는 “서울 사람들이 아는 대림역 인근은 성공한 외국인들이 사는 동네”라며 “전체 인구의 5% 이상이 외국인이면 다인종 국가로 보며, 한국은 이미 다인종 국가가 된 지 오래됐다”고 설명했다.
내리 외국인 타운에서 다시 안성시 고삼면 쌍지리로 이동했다. 신안성 변전소를 보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송전 계통은 크게 765킬로볼트(kV), 345kV, 154kV로 이뤄져 있다. 수도권이나 대용량 부하가 필요한 곳은 주로 765kV 선로를 통해 송전한다. 신안성 변전소의 전기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동해안의 화력발전소를 가동해서 전기를 끌어오는데, 동해안 발전소 전기를 가져올 수 있는 송전망이 없고, 그마저도 강원도 횡성에서 막혀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SK하이닉스는 반도체 공장을 지으면서 발전소를 같이 짓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다시 차량은 지도의 오른쪽으로 달리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일대로 향했다.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공장이 들어설 곳이다. 나무를 모조리 베어내 민둥산이 된 부지를 포크레인이 열심히 다지는 중이었다. 그 옆으로 산단 내 345kV 변전소 건설 예정지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뉴스 이면의 인간을 본다
김 작가는 “공장이 전기를 쓰기 위해서는 765kV를 345kV로 낮춰줘야 하는데, 여기 변전소가 건설되면서 전기에 있어서는 진심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부지가 실체를 드러내면서, 원산면 일대의 마을들도 변화를 겪고 있었다.
마을회관과 당산나무가 있는 조용한 시골 마을은 투자자들이 몰리면서 벌써부터 땅값이 크게 올랐다.
원삼면 SK반도체 클러스터가 이미 토지보상이 끝난 상태에서 토목공사에 들어갔다면,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이동읍과 남사면 마을 곳곳에선 개발을 놓고 찬반이 극렬한 모습을 플래카드로 확인할 수 있었다.
“복잡하게 뒤엉킨 모습이야말로 대서울다운 모습이죠. 저는 길을 비롯해서 머릿돌과 비석, 간판, 팸플릿·벽보·플래카드, 점집 깃발, 버스 정류장 이름 등 시민이 도시를 걸을 때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힘껏 발굴합니다. 여기 플래카드에 ‘국가는 죽음이다’라고 누군가가 처절한 문구를 적었습니다. 누군가는 ‘알박기’라고 말할 수 있지만, 또 누군가는 이주 때문에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쫓겨나는 일이잖아요. 뉴스 이면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게 바로, 인문학 아니겠습니까.”
이현주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