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이른바 ‘빅5’를 비롯한 상급종합병원(3차 병원)의 중증 환자 중심 전환에 연간 3조원을 투자한다. 경증 환자가 상급병원에서 진료받으면 지금보다 돈을 더 내고 중환자는 덜 내는 방안도 추진한다. 한국 의료의 고질병인 ‘상급병원 쏠림’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이지만 의료계에선 전환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오지 않도록 제도 설계를 정교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상급병원 중환자 비중 높여
유정민 보건복지부 의료체계혁신과장은 21일 서울 을지로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혁신적 의료공급 및 이용체계 개편 방안’ 공청회에서 이런 내용의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방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중증, 희소, 고위험 질환 환자를 담당하는 상급병원의 개편을 의료 정상화를 위한 최우선 과제로 보고 의대 증원 계획을 발표한 2월부터 이번 방안을 준비해왔다.
유 과장은 “전공의 복귀가 더딘 상황에서 비상진료체계를 강화하면서 중증·응급 체계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동시에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을 올해 하반기부터 3년간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시범사업에 투입되는 예산은 건강보험과 국고 지원을 합쳐 연간 3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3년간 9조원을 투입해 상급병원이 이전처럼 전공의(인턴, 레지던트)에 의존하지 않고 중증·응급 환자 진료에 집중하고도 충분한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로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전공의들의 집단 이탈 전 평시 기준 39%이던 상급병원의 중환자 진료 비중을 3년 내에 60%로 높일 계획이다. 이를 위해 1000여 개 중증 질환의 수가를 높인다는 계획이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상급병원과 지역 내 1~2차 병원 간 네트워크도 강화한다. 정부 시범 사업에 참여하는 상급병원들은 최소 10개 병원과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 경증 환자는 동네 의원급인 1차 병원에, 중등증은 종합병원급인 2차 병원으로 가고 상급병원은 중증 환자를 전담하는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정부는 경증, 비응급 환자가 권역·지역응급의료센터를 이용하면 본인 부담금을 단계적으로 인상한다는 방침이다.
1차 병원만 거쳐 상급병원으로 직행한 환자의 의료비 부담도 높인다. 2차 병원 의뢰서가 없는 환자는 상급종합병원 진료 시 본인부담률이 현행 60%보다 높아진다. 반대로 2차 병원에서 중증도를 인정받은 환자의 본인부담률은 이보다 낮아진다. 정부는 네트워크를 이룬 진료협력병원 간엔 최우선 예약 등 ‘패스트트랙’도 적용하기로 했다.○서울 대형 병원 일반병상 15% 감축병원의 인프라도 달라진다. 시범 사업에 참여하는 병원들은 서울의 경우 1500병상 이상은 일반 병상의 15%, 경기·인천은 10%, 비수도권은 5%를 감축해야 한다. 반대로 중환자 병상을 늘리는 병원엔 인센티브가 부여된다. 전체 소속 의사 중 40%에 달하던 전공의 의존도는 단계적으로 20%까지 축소되고, 그 빈자리는 전문의와 진료지원간호사(PA간호사)로 구성된 팀이 메운다.
이 같은 변화는 47개 상급병원 가운데 시범 사업에 신청한 병원에만 적용되지만 사실상 대부분 대상 병원이 참여할 전망이다. 지원 규모가 클 뿐 아니라 2027년 이뤄지는 상급병원 재지정에도 반영되기 때문이다.
공청회에 참여한 의료계 인사들은 이 같은 방향에 대체적으론 동의하면서도 전환 과정에서 제도 설계를 정교하게 할 것을 주문했다. 박진식 세종병원 이사장은 “종 간, 지역 간 의료기관들이 경쟁이 아니라 협력에 나설 수 있는 보상 체계를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상일 울산대 의대 교수는 “(시범사업 결과) 다른 곳에서 의도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촘촘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상급종합병원 진료 구조를 바꾸겠다는 내용만 있고 이용자 측면에서 뭐가 바뀌는지에 관한 계획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며 “이용자 시각에서 제도 변화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황정환/허세민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