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내게 어떻게 왔던가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입력 2024-08-20 17:15
수정 2024-08-21 15:42

새 시집 나오고 몇 달이 지나자 시집 출간의 기쁨과 설렘이 가라앉는다. ‘꿈속에서 우는 사람’이란 제목은 애초부터 정해진 게 아니었다. 처음 제목은 ‘두부’였다. 누군가 나보다 먼저 제목에 쓴 사람이 있어 그 제목을 철회하고 대안으로 올린 게 ‘모란꽃 피는 일과 소년들의 선행’이다. 하지만 그 제목도 시집을 관통하는 정서를 집약한다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여러 의견을 조율한 끝에 낙점된 게 ‘꿈속에서 우는 사람’이다. 삶이란 게 아득한 한낮의 꿈이고, 나날의 삶이 한바탕의 몽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생명 향한 연민이시의 촉매제

출판사에서 보낸 첫 교정지를 받아보고 암담했던 게 선명하게 떠오른다. 처음 착상한 시와 활자화된 시가 다른 데 놀라고,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들에 당황했다. 이 시집은 망했구나! 시집 출간을 작파할까 할 만큼 낙담이 컸다. 교정지를 붙들고 퇴고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시들은 군더더기를 털어내고 달라졌다. 시가 최초의 착상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어떤 시행은 사라지고 어떤 단어는 다른 단어로 대체됐으며, 긴 시행들은 간결하게 정리됐다. 한 시집의 교정을 네 번이나 본 적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번 시집에서 표제작인 ‘꿈속에서 우는 사람’을 포함해 ‘멜랑콜리’ ‘노스탤지어’ ‘버드나무 갱년기’ ‘이별의 노래’ ‘하이네켄 맥주를 마시던 시절’ 같은 시가 마음에 들었다. 이 시편들은 파주에 살면서 썼다. 몸으로 거친 유순한 시간의 저 밑바닥에 흐르는 노스탤지어와 멜랑콜리를 시의 모티브로 삼았다. 모란과 작약 같은 봄꽃, 덧없이 드리워진 오후의 그림자들, 저녁의 지는 해, 등을 말고 종일 자는 고양이를 보면 슬퍼졌다.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허무, 무의 불가사의함에 대한 탄식, 생명 가진 것을 향한 연민이 내 시의 촉매제다. 독자들이 내 시에서 권태와 우울함이 주조음이라 할지라도 부디 사랑이나 슬픔, 아름다움에 감응해 벅차오르는 환희에 공명하길 바란다.

시는 고양이가 오듯 다가왔다

어쨌든 시집이 나온 뒤 여러 군데 동네서점에 초대돼 북토크를 했다. 서울에서 열린 북토크에 참석하려고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분의 고백에 감동을 받은 적도 있었다. 대개는 무료 행사지만 티켓을 사서 입장하는 북토크도 있었다. 요즘은 시인들이 시집을 내고 북토크를 하는 게 하나의 관례로 정착한 느낌이다. 한 책방의 북토크에서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시를 한 편씩 골라 낭독했는데, 한 분이 시를 읽으며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그건 낭독한 시가 마음에 온전한 공명을 불러일으킨 탓이었을 테다. 시를 묵독할 때와 낭독할 때의 느낌은 다르다. 시가 목소리로 전달될 때 시가 새롭게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시집과 관련해 황당한 일을 겪었다. 온라인 서점에 누군가 올린 별점 사건이다. 누군가가 내 시집에 별점 두 개를 준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불쾌한 일이었다. 한 권의 시집은 시인이 겪은 정신의 노고와 삶의 압축이다. 최선을 다한 시는 피의 분출이고, 시인의 땀과 눈물의 열매다. 그걸 경솔하게 재단하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근거도 없이 별점 두 개를 준 것은 악의거나 익명성 뒤에서 저지른 폭력일 뿐이다. 시집이 제 취향과 다르거나 기대에 못 미쳐 실망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내 시가 이상의 ‘오감도’ 같은 이해불가능한 난해시는 아니지 않은가? 이 당사자는 괴팍하거나 편견에 사로잡혀 별점 테러를 저지른 것이라는 추측과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를 읽은 흔적이 없고, 별점 두 개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와 논리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점에서 그렇다.

돌이켜보면 시는 고양이가 오듯이 다가왔다. 시는 내게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왔지만 그건 놀랄 만한 사건이고, 끔찍한 아름다움이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생의 복잡함을 헤치고 시가 오던 시절은 파릇했다. 나는 열다섯 살, 혹은 열일곱 살, 혹은 스무 살이었지. 내 마음에는 티끌이나 불순함 따위는 단 한 점도 없었다. 그랬으니 시 한 편에 목숨을 건 듯 팔딱거렸겠지. 평생 독자로 살아도 좋으련만 꾸역꾸역 등단을 하고 시를 업으로 삼았지만 이젠 시가 생동하는 기쁨이거나 살아야 할 이유가 아니다. 시가 주던 옛날의 기쁨과 의미는 덧없고 시들해졌다. 시가 처음 오던 시절의 보람과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까.

메마른 가슴의 빗방울과 씨앗

시는 경험과 세계에 대한 비범한 통찰이나 새로운 발견, 게다가 시는 언어의 연금술을 넘어서는 삶의 방식이다. 시는 가을의 별자리나 삶의 단편들, 운명의 원소, 혹은 당신의 왼쪽 뺨으로부터 수신된 것! 도시에서의 삶이 저토록 척박하지 않고, 바다가 그토록 거칠게 날뛰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시를 쓰지는 않았으리라. 시인들은 제 시가 가난과 비루함을 강철같이 꿰뚫고, 우리의 내면을 단련하기를 바란다. 좋은 시는 싹트고 뻗고 솟구치고 춤추며 일상과 낡음을 무찔러 미래를 열어젖힌다.

오, 시는 내게 어떻게 왔던가? 나는 세계에 귀를 대고 주의를 기울이며 듣는다. 시가 오는 기척을 알아채고 릴케가 기쁨에 젖은 채 첫사랑을 노래하듯 내게 온 시를 노래할 수 있을 테다.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살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행복이 반짝이며 하늘에서 몰려와/ 날개를 거두고/ 꽃피는 나의 가슴에 걸려 온 것을…….”

시는 내게 햇살, 꽃보라, 기도였다. 시가 내 메마른 가슴에 빗방울과 씨앗을 뿌렸다. 가슴은 시로 인해 빛과 기쁨으로 가득 차고 외로움조차 화사해졌다. 오, 어머니가 애써 말리셔도 소용없어요! 시가 험한 세상 건너는 데 아무 쓸모가 없다고 가르치실 필요도 없어요. 어머니가 말려도 나는 꿋꿋하게 시를 쓰고 말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