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농심, 교환사채 1600억 발행…18년만에 자사주 정리

입력 2024-08-19 14:12
이 기사는 08월 19일 14:12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농심이 자기주식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교환사채(EB) 1600억원어치를 발행한다. 카카오 호텔신라 등에 이어 EB를 발행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자사주 소각을 비롯한 주주환원 행렬에 동참하기보다는 EB 발행으로 자사주를 '꼼수' 처분하고 나섰다는 지적이 많다.

19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농심은 오는 9월 사모 EB 발행을 앞두고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인수 의사를 타진 중이다. 교환대상은 농심이 보유한 자사주 전량(30만19주·지분율 4.99%)이다.

교환가격은 기준 주가에 약 15% 할증률을 적용할 예정이다. 최근 한 달간 평균 농심 주가는 약 45만원이다. 여기에 할증률을 더해 1500억원 후반대의 자금을 모집하겠단 계획이다. 조달하는 자금은 울산 삼남 물류단지 조성에 사용된다. 농심은 이 물류단지 구축에 229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표면·만기 이자율은 연 0%로 결정됐다. 투자자는 이자수익 없이 교환대상 주식가격의 시세 차익으로만 수익을 얻는 구조다. 농심은 2006년 말 807억원에 매입한 자사주를 이번에 처분하게 된다.

이처럼 자사주를 EB로 처분하려는 기업들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 자사주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EB를 발행한 상장사는 23곳으로 집계됐다. 지난 4월 카카오(2930억원)를 비롯해 호텔신라(1328억원), 제이오(500억원), 씨에스윈드(446억원), 자화전자(375억원) 등이 자사주를 기초자산으로 EB를 발행했다.

이들 상장사는 당시 주가보다 높은 가격에 EB를 발행했다. 자사주를 시장에 매각하는 것보다 더 비싼 값에 팔았다는 의미다. EB 만기일까지 주가가 교환가격을 밑돌아도 이들 상장사는 손해보는 것이 없다. 연 0%대의 낮은 금리로 발행한 덕분에 금융비용을 대폭 아낄 수 있어서다. 고금리 시장 환경에서 이 같은 EB 장점이 한층 부각됐다.

증시가 출렁이는 과정에서 주식보다 EB를 선호하는 투자자도 늘었단 분석도 나온다. 주가가 하락해도 손실 폭이 크지 않아서다. 전액 상환하면서, 원금을 고스란히 돌려받을 수 있다. 연 3~6%대 이자비용만 감수하면 되는 것이다.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비롯한 메자닌(주식 관련 사채)에 비해 불확실성도 크지 않다. 이들 메자닌 상품은 발행 1년 뒤에나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다. 반면 EB는 짧으면 한 달 뒤부터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다. 앞으로 주가 흐름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올 3분기에 도입되는 ‘증권의 발행 및 공시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적용받지 않기 위해 농심을 비롯한 상장사들이 EB 시장에 등장했다는 지적도 있다. 개정안에는 자사주를 처분할 때 처분 목적과 주식가치 희석 영향 등을 상세히 공시하는 방안이 담긴다. 자사주 소각을 유도해 주주가치를 높이려는 목적이 깔려 있다. 하지만 EB 발행으로 기업들이 이 같은 개정안 도입 목적을 거스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주주들의 불만도 크다. EB가 보통주로 전환되면 시장에 기업의 자사주 물량만큼 유통 주식 수가 늘어나 주가가 하락할 가능성도 있다. 올해 자사주를 기초자산으로 EB를 발행한 상장사 대부분은 주가가 하락했다. 호텔신라는 7월 초 EB 발행을 결정한 뒤 한달여 동안 주가가 약 10% 하락했다. 제이오 주가는 지난 5월 초 대비 약 34% 하락했다.

농심 관계자는 이에 대해 "보유한 자사주를 활용한 교환사채 발행을 비롯한 다양한 자금조달 방안을 검토 중에 있다"며 "시기나 방법 등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된 바 없다"고 설명했다.

최석철 기자 dols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