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수 추계를 둘러싼 정부와 의사 간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인구 고령화와 지역 간 의료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의사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의사 단체는 과도한 인력 증가는 의료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 같은 갈등은 국내 의료 수요를 기준으로 한 의사 수 추계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더 복잡하고 국제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의사 부족 현상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특히 저소득 국가에서 이 문제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 의사 대부분은 고소득 국가에 집중돼 있다. 반면 아프리카와 동지중해 지역 등 저소득 국가는 심각한 의사 부족 문제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크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선진국이 자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만 의료 인력을 양성할 경우 세계적인 의료 불균형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폴란드와 루마니아 같은 동유럽 국가의 많은 의사가 더 나은 급여와 근무 조건을 찾아 서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자국 내 의료 인력 부족이 심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동유럽 환자들은 긴 대기 시간과 낮은 의료 서비스 질을 감수해야 하는 실정이다. 의사 인력의 국제적 이동이 한 국가의 보건 시스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서 글로벌 보건 문제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의 의사 인력 수급 계획이 단순히 국내 수요에만 맞춰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로벌 차원의 필요를 고려한 의사 수급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접근을 넘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장기적으로 국내 의료 서비스 질을 향상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과제다.
한국은 과거 미국 미네소타대와 협력해 서울대의 의학 교육과 병원 운영 체계를 크게 개선한 경험이 있다. 6·25전쟁 직후 1950년대에 이뤄진 이 협력은 오늘날 한국 의료 인프라의 근간이 됐다. 이제는 세계에 보답할 때다. 구체적으로 저소득 국가 학생을 대상으로 영어로 교육할 수 있는 의과대학을 신설하거나, 수도권 의과대학에서 저소득 국가 학생을 위한 전형을 도입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런 교육 프로그램은 졸업 후 자국으로 돌아가 의료 활동에 종사하도록 장학금을 지원하고, 자국에서의 의무 근무를 전제로 한 국가 간 협력을 통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사 수급 추계를 할 때 의사들의 국제적 이동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국내에서 양성된 의사가 모두 국내에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따라서 의사 수급 계획은 단순히 숫자 계산을 넘어 의사들의 이동성, 국제적 역할, 그리고 글로벌 헬스케어에 대한 기여까지 포괄하는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