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온 작품인데, 왜 내가 돈을 주고 봐야 하지?”
3년 전 집 소파에 앉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화면을 뒤적이던 배우 류덕환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분명 자신이 나온 드라마와 영화인데, 정작 ‘소유한’ 작품은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배우의 저작권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직업인 배우들이 자기 작품을 만들거나 가지기 어렵다는 결핍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류덕환 전시 프로젝트 ‘에틱’의 시작이다. 2년에 걸쳐 준비를 끝낸 첫 번째 전시가 지난 2월 열렸다. 관객 반응은 뜨거웠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8월, 또 한 번의 전시 기회를 얻었다. 서울 성수동 앤더슨씨에서 ‘NONFUNGIBLE: 대체불가’를 열고 관객을 기다리는 배우이자 연출가, 류덕환을 만났다.
“연기하는 배우지만 누군가 ‘네 영화를 어디서 봐야 하냐’고 물으면 내가 꺼내 보여줄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있었어요. 연기를 쉬는 동안 미술과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들을 만나며 이런 결핍을 깨달았죠.”
그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류승룡, 박정민, 지창욱, 천우희 등 배우 네 명을 만나 대담을 나눴다. 그들의 답변을 영상에 담아 전시했다. 앤더슨씨에 배우들의 방도 꾸몄다. 한 건물에 있지만 방마다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온 듯하다.
류덕환에게 왜 4인방을 섭외했는지 묻자 “친해서”라는 단순한 답이 돌아왔다. “나와 친하다는 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는 그는 “관객과 독대하는 느낌을 내기 위해 격식 없는 반말 연출을 의도했다”며 “평소 잘 아는 사람을 섭외하면 준비한 질문이 소진되거나 인터뷰가 다른 길로 새더라도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집 안 숟가락 개수’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친구들이지만, 류덕환은 촬영을 하며 네 명의 배우에게 수없이 놀랐다.
“솔직해서 오히려 걱정했을 정도였어요. 한 시간 반 인터뷰하는 동안 배우들이 소통 창구가 필요했다는 걸 깨달았죠.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모습을 보며 배우들에게 내가 생각하지 못한 고민과 고충이 있다는 사실에 공감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류덕환은 관객들이 몰랐던 ‘진짜 자신’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기획한 ‘관객 인터뷰’도 이런 맥락에서 이뤄졌다. 관객을 방에 앉혀 놓고 한 가지 질문을 던진 뒤 1분간 내놓는 대답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방식이다. 2월 전시에서는 관객 1500명이 의자에 앉아 물음에 답했다.
류덕환은 “관객 인터뷰로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잘 모르고 산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이어 “인간은 자신을 모르는 것을 참기 힘들어하지만, 그건 창피한 일이 아니다”며 “타인이 좋아하는 걸 찾다 보니 나를 챙길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관객 인터뷰를 마련한 것도 ‘잠시라도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는 “일부러 쉬운 질문 대신 ‘살면서 절대 안 받아볼 것 같은 질문’만 넣었다”며 “한 번쯤은 단 1분이라도 그런 시간이 있으면 좋지 않겠나”고 했다. 이어 류덕환은 “첫 전시를 해보니 일반인은 인터뷰를 하기 싫어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며 “인터뷰 1500편을 모두 봤는데, 각양각색의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답 대신 노래를 하거나, 말을 않는 사람도 있었다”며 “‘최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1분 내내 울다가 ‘없다’는 한 마디를 뱉고 사라진 관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모든 관객은 인터뷰 이후 자신의 영상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다. 자신이 담긴 영상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영상을 선물하는 이유를 묻자 류덕환은 “미디어 전시인데, 미디어를 가지고 돌아가야 하지 않나”고 했다.
배우이면서 동시에 연출가의 삶을 선택한 류덕환. 그는 배우와 전시 기획자로서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고 느꼈다. 그는 “배우는 이기적인 삶을 살고, 기획자는 이타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배우였을 땐 나만의 연기로 화면 밖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며 “기획자는 주변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내 신념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류덕환에게 ‘앞으로 배우 류덕환으로, 연출가 류덕환으로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1분 가까이 먼 곳을 바라보며 고민한 그가 내놓은 대답은 “류덕환이 자기 직업을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였다. 그는 “연출가로서 나는 뛰어난 것을 만들거나 돈을 잘 버는 게 목표가 아니다”며 “이런 기획을 하는 이유는 오직 배우라는 직업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8월 25일까지.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