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채의 종말…중소→중견→대기업 '계단형 이직 시대'

입력 2024-08-13 17:47
수정 2024-08-14 02:13
“현대자동차로 이직하겠다며 수시채용에 다섯 번이나 도전해 회사를 떠난 직원이 있습니다. 대기업 수시채용이 늘면서 공지가 뜰 때마다 중견급 직원들이 들썩들썩합니다."

국내 한 중견 제조업체 인사담당자의 말이다. 채용시장이 공개채용(공채) 중심에서 수시채용 중심으로 바뀌면서 중소·중견-대기업 간 계단식 노동인력 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대기업의 채용 문화 변화가 청년과 중견기업의 구직·채용 트렌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업체 간 이직자 415만 명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말 발간한 ‘공채의 종말과 노동시장의 변화’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업들의 전체 채용공고 중 공채 비중은 35.8%, 수시채용과 상시채용은 각각 48.3%, 15.9%였다. 공채 비중은 2019년 39.9%에서 2022년 37.9%, 2023년 35.8%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해 공채를 진행했다고 응답한 기업의 20.0%는 “올해까지만 공개채용을 할 계획”이라고 밝혀 앞으로 감소폭이 더 커질 전망이다.

대기업이 수시·상시채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중소기업 근로자가 중견기업으로, 중견기업 근로자가 대기업으로 이동하는 ‘연쇄 이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지난 6월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일자리 이동통계 결과’에 따르면 2022년 12월 기준으로 기업체 간 이직자는 415만9000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16.0%에 달했다. 이직자의 71.3%는 중소기업 소속이었으며 이 중 12.0%는 대기업으로 이동했다. ‘범용 인재’ 몰락…기수 문화도 무너져수시채용 확산은 기업의 채용 문화도 바꿔놓고 있다. 정기 공채는 범용 인재를 선발해 회사 적합형 인재로 키워내는 방식이다. 반면 수시채용은 직무에 이미 전문성이 있는 인재를 선발해 조직 효율을 끌어올리는 게 목표다.

한 에너지 대기업의 채용담당자는 “수시채용은 철저하게 빈자리가 난 개별 부서의 필요에 맞춰 뽑는 ‘작살형 채용’ 형태로 진행된다”며 “같은 회사여도 수시채용 공고마다 원하는 인재상이 천차만별”이라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예전과 달리 지원한 회사에서 탈락해도 재수, 삼수 지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다른 대기업 인사담당자도 “수시채용은 예전처럼 그룹 차원에서 관할하지 않고 개별 부서에 맡기는 회사도 있다”고 전했다.

이렇다 보니 기존 공채 기수 중심이던 조직 문화도 바뀌고 있다. 노동연구원이 5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공채 출신들이 뭉치는 관행이 강하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은 26.8%에 그쳤다. ‘보통이다’와 ‘그렇지 않다’가 각각 33.7%, 39.4%로 더 높았다.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대기업으로 이동한 직원의 빈자리를 다른 중견기업에서 빼오는 방식으로 채워나가다 보니 임원을 제외한 직원 중 공채 출신 비율은 20%가 채 안 된다”고 말했다.

공채 감소에 코로나19까지 겪으면서 신입사원 집단 교육이나 연수 개념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한 유통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그룹 연수원을 축소하거나 기능을 전환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며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소속감도 많이 떨어지는 편”이라고 했다. 신규 입사자 4명 중 1명 ‘중고 신입’지난 3월 한국경제인협회의 ‘500대 기업 채용인식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대졸 신규 입사자 4명 중 1명은 ‘중고 신입’이었다. 중고 신입 바람이 불면서 ‘무경력 생짜’ 신입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노동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경력 없는 신입 채용 비중은 2019년 47.0%에서 2022년 42.5%, 지난해 40.3%로 낮아졌다. 고용노동부 채용 동향 조사에 따르면 2021년 하반기 65.5%에 달하던 신입 비중은 2023년 하반기 2년 만에 46.7%로 18.8%포인트 급감했다.

경력이 없는 청년은 일을 못 구하고, 일을 못 해 경력을 못 쌓는 악순환에 놓였다. 양질의 1차 노동시장을 선배들과 경력직에 내줄 수밖에 없다 보니 청년들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는 중소·중견기업 비중이 높다. 2023년 고용보험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한 결과 15~34세 청년의 첫 취업처 중 99.3%가 근로자 1000명 이하 기업이었다. 대기업을 가려고 해도 결국 중견기업을 징검다리 삼아 ‘경력 점프’를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를 간파한 중견기업 역시 무경력 신입 채용을 기피한다는 점이다. 신입들의 이른 퇴사가 늘면서 채용 비용 회수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앞서 한경협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업 1인당 채용 적응 비용이 2000만원 이상이라고 답한 비율은 64.2%에 달했다.

홍경의 고용부 청년고용정책관은 “정부는 기업의 수시 경력직 채용 트렌드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청년들이 직무, 실무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양질의 일 경험과 실무 프로젝트 중심의 직업훈련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며 “기업과 청년들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해 채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스매치를 줄이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