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가스값 청구서' 오나…러시아의 위기 [원자재 이슈탐구]

입력 2024-08-12 02:01
수정 2024-08-12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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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지상군이 지난 6일 러시아 영토로 진격해 쿠르스크주 수드자 지역을 점령했다.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 오름세는 가팔라졌다. 수드자 지역에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 계측소가 있다는 게 이유다. 그런데 애초에 러시아 가스 파이프라인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지나고 있어 마음만 먹었다면 가스관을 끊을 수 있었다. 가스값이 왜 지금 오르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동부 영토 상당 부분을 빼앗겼고, 수비 병력도 부족한 우크라이나가 돌연 공격에 나선 데 대해 해석이 분분하다. 표면적으론 동부 전선의 러시아군을 일부라도 철수시키기 위해서란 설명이 유력하다. 수드자에서 모스크바까지 직선거리는 530㎞에 불과하다. 우크라이나가 영토를 점령하고 버텨 휴전 협상의 지렛대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일각에선 음모론을 근거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가스 공급을 막기 위한 작전을 벌일 것이며, 글로벌 액화천연가스(LNG) 가격이 단기적으로는 급등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전쟁 시작 2년 6개월 만에 갑자기 이뤄진 우크라이나의 진격은 때마침 F-16 전투기가 처음 투입돼 성공할 수 있었다. 이번 작전이 미국이 추진하는 모종의 전략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갑자기 치솟는 유럽 가스값 10일(현지시간) 외신 등에 따르면 유럽 천연가스 벤치마크인 네덜란드 TTF가스 선물 가격은 지난주 메가와트시(㎿h)당 40.3유로를 돌파하며 8개월 만에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했다. 한 달 새 24.5%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TTF가스 가격은 지난달 26일부터 급등했고,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영토 점령 소식이 전해지자 또 한 번 크게 올랐다. 통상 유럽은 러시아 가스관 덕분에 동북아시아보다 가스를 싸게 사서 썼으나 지금은 유럽이 오히려 더 비싸게(1㎿h = 약 3.41MMBTU) LNG를 사 모은다는 얘기다. 2022년 LNG 파동 때 처럼 물량 확보 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계 최대 LNG 수입 지역인 동북아 시장(JKM) 선물 가격은 지난 8일 기준 100만BTU(열량단위)당 12.57달러로 7월 초와 비슷하다. 코로나19 팬데믹 전인 2019년 9월보다 살짝 높은 수준이다. 미국 헨리허브 가스값은 100만BTU 당 2.161달러로 지난 5월보다 오히려 낮다. 반면 유럽 TTF 가스 가격은 러시아로부터 평화롭게 가스를 공급받던 시절보다 현재 두 배 이상으로 올랐다.

유럽의 가스 수입 허브인 로테르담항 LNG터미널의 TTF가스 시세는 값싼 러시아 파이프라인 가스의 공급 부족이 예상될 때 급등한다. 동유럽과 이탈리아 등은 지금도 높은 비율의 천연가스를 러시아 가스관으로 수입하며, 부족분만 해상으로 LNG 형태로 수입한다. 갑자기 유럽 가스 선물 가격이 오른 것은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위협받는다는 신호란 해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가스관 막을 결심 했나 아직 우크라이나가 가스관을 위협한다는 어떤 징후도 없다. 러시아는 여전히 유럽행 천연가스의 절반 가량을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가스관으로 보내고 있다. 우크라이나 가스 전송 시스템 운영자(TSO)는 지난 8일 블룸버그통신에 "가스 흐름은 안정적이며 아무 변화 없다"며 "가스를 막고 싶었다면 수드자를 점령하지 않고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전쟁 초기부터 자국을 지나는 가스관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얘기다. 만일 우크라이나가 가스관을 잠궜다면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 많은 유럽 국가들이 추위에 떨었을 것이다. 2022년 가을 가스값이 30배 이상 폭등했던 LNG 파동 역시 장기화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우크라이나는 가스관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가스관으로 보내는 천연가스 양을 줄여 문제가 됐었다. 우크라이나가 가스를 막아 유럽 각국의 미움을 샀다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부터 군수 지원을 받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우크라이나가 가스관을 끊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러시아 에너지 기업 가즈프롬의 우크라이나의 가스관 이용 계약 만기는 올해까지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3월부터 "가즈프롬과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면서도 2년 넘게 지속했던 계약을 이제야 종료시킨다는 얘기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등 유럽 주요국들은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스를 들여오는 등의 대책을 검토 중이나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러시아 역시 난감한 상황이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과 노르드스트림 가스관 폭발러시아도 2022년 전쟁을 일으키기 전 우크라이나를 피해 유럽에 가스를 공급할 대책을 마련했었다. 2014년 무력으로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빼앗은 뒤 우크라이나를 지나는 가스관이 불안해지자, 발트해를 통해 독일로 연결되는 노르드스트림2 가스관을 서둘러 건설하고, 흑해를 가로질러 튀르키예로 가는 튀르크스트림 가스 라인도 2020년 준공시켰다. 우크라이나를 지나는 소유즈·브라트스트보 가스관을 쓰지 않고도 유럽에 천연가스를 보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계획이 틀어진 것은 2022년 9월 발트해의 노르드스트림1·2가 폭파됐기 때문이다. 2012년부터 가동한 노르드스트림1의 두 라인 중 하나가 파손됐고, 2021년 9월 완공돼 본격 운영을 앞둔 노르드스트림2는 두 라인 모두 못 쓰게 됐다. 인접국 스웨덴의 조사 결과 테러라는 게 확인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즉각 서방을 비난했다.

연관을 부인했지만 테러를 실행한 주체는 우크라이나란 정황이 드러났다. 이듬해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장황한 기사로 노르드스르림 폭발은 우크라이나 특수부대의 소행이라는 뉘앙스로 보도했다. 노르드스트림이 없어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목줄을 죌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같은 해 10월엔 튀르키예스트림 가스관마저 폭파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러시아 측이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크라니아가 단독으로 해외에서 이런 작전을 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을 배후로 지목했다. 앞서 언급한 WP기사는 "미 중앙정보국(CIA)은 이미 계획을 인지하고 유럽 동맹국엔 통보했다"고 썼다. 다만 실행에는 가담하진 않았다는 주장이다. WP는 해당 기사에 "당시 러시아가 노르드스트림을 사용하고 있지 않아 폭파 사건은 유럽 동맹국들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사건 당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했던 말과 비슷하다.

애초에 우크라이나가 이 같은 작전을 단독으로 성공시킬 능력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일상적으로 해외에서 공작을 벌이고, 이에 기반해 '미션 임파서블' 등 첩보 영화도 즐겨 찍는 미국과는 다르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독일과 영국 자본이 들어갔고, 독일로 향하는 가스관을 파괴하는 정치적 결정을 우크라이나 혼자 했을 가능성은 낮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뉴욕타임스 출신 세이모어 허쉬 기자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가스관 폭파를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는 단호하게 부인했다. 다만 우연인지 모르지만 노르드스르림 가스관이 폭파된 2022년 미국은 세계 1위를 다투는 LNG 수출국으로 올라섰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집계 기준으로 2019년 미국의 LNG 수출량은 호주, 카타르의 절반 수준이었다.

미국, '푸틴의 자금줄'에 일격 가하나이번에도 우크라이나가(미국이) 가스관을 끊는 등의 사건을 일으켜 러시아의 재정 수입에 타격을 줄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우크라이나가 일찍이 러시아와의 가스관 이용 계약 연장불가 방침을 예고한 것은 유럽과 동아시아 등이 대비할 시간을 주는 차원이었다는 관측이다. 물론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근거는 없다.

다만 미국 에너지 기업들의 신규 LNG터미널 건설 공사가 속속 끝나고 있다. 카타르에너지와 엑손모빌이 합작한 멕시코만의 골든패스 LNG터미널은 건설사 부도 등 우여곡절에도 내년 상반기엔 문을 열 예정이다. 시험 가동 중인 루이지에나주의 플래키마인즈(Plaquemines) LNG터미널의 2단계 시설도 지난달 미국 에너지부(DOE)으로부터 미국산 LNG의 해외 수출과 외국산 LNG 재수출 허가를 받았다.

러시아도 최근 중고 LNG선박을 대거 사모으고 북극(ARCTIC) LNG-2 프로젝트 진행을 서두르는 등 대응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뭔가 벌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2022년 CIA가 가스관 폭파 작전을 몇몇 국가에 통보한 6월 이후 LNG가격은 무섭게 상승했다. 평소 LNG를 많이 안 사던 유럽이 미국산 등 LNG를 마구 사들인 탓에 글로벌 가격이 뛰었고 파키스탄 같은 국가는 물량을 빼앗겨 추운 겨울을 보냈다.

한국은 물랑은 확보했지만 금전적으로 손해를 봤다. 한국 정부와 업계가 당시 노르드스트림 가스관 폭발 테러가 일어날줄 알고 있었는지는 미지수다. 2022년 8월초 한국가스공사의 LNG비축량은 총저장용량(557만t)의 25%에 불과한 137만t 수준이었다. 한국 기업들이 현물시장에서 가스를 사들이면서 2022년 대규모 무역적자의 절반 가량이 LNG가격 상승분 때문에 발생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