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 1월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 정책을 내놓은 뒤 자사주를 사들이는 기업이 늘고 있다. 하지만 자사주 매입을 공시한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46%, 코스닥시장 상장사의 60%는 주가가 오히려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이익 체력’을 넘어서는 주주환원책 공시는 투자 심리에 독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매입=상승’ 공식 깨졌다11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 들어 유가증권시장에서 자사주 매입을 공시한 상장사는 90곳이었다. 이 중 47곳(52.2%)은 자사주 매입 발표 후 지난 9일까지 주가가 올랐지만 42곳(46.7%)은 하락했다. 1곳은 주가가 보합이었다. 90개 종목의 공시 후 평균 주가 상승률은 3.08%였다.
상승률이 높았던 종목은 한미반도체(105.9%), 스틱인베스트먼트(43%), 한화손해보험(32%) 등이었다. 반면 에이피알(-43.3%), 에프앤에프(-33.95%), 두산밥캣(-26.2%) 등은 주가가 크게 내렸다.
코스닥시장에서는 163곳이 자사주 매입 공시를 냈다. 이 중 99곳(60.7%)은 공시 후 주가가 하락했다. 건강식 플랫폼 ‘랭킹닭컴’ 운영사 푸드나무(-52.3%), 반도체·특수가스 전문업체 티이엠씨(-48.3%) 등이 높은 하락률을 기록했다. 주가가 오른 기업은 60곳(36.8%)에 불과했고 4곳은 보합이었다. 163개 종목은 주가가 공시 후 평균 2.05% 떨어졌다. ‘자본 절약’의 딜레마정부가 1월 밸류업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상장사들 사이에서 자사주 매입 열풍이 불었다. 자사주 매입은 유통 주식 수를 줄이는 효과가 있어 주식시장에선 호재로 취급된다. 자사주 취득은 주가가 저평가일 때 이뤄진다는 인식이 있어 신규 투자자가 유입되기도 한다. 기업들이 주가 부양 수단으로 자사주 매입을 활용해온 이유다.
올 들어 지난 9일까지 총 6조879억원어치의 자사주 매입 계획이 발표됐다. 전년 동기 대비 3977억원 늘었다. 유가증권시장에서 메리츠금융지주(3월·5000억원), 기아(1월·5000억원), 고려아연(8월·4000억원) 등이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공시했다.
전문가들은 ‘밸류업 대표주’로 꼽히는 금융 관련주를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7일 미래에셋증권과 KB금융이 자사주 소각 계획을 밝히는 등 금융사들은 밸류업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KB금융, 하나금융지주, BNK금융지주, 신한지주 등은 올해 자사주 매입 공시 이후 주가가 22.3~26.1% 올랐다. 설용진 SK증권 연구원은 “거시경제 지표 악화로 은행들 수익성이 제한적임에도 주주환원 매력은 은행주의 주된 투자 포인트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코스닥시장에서는 화장품 업체 브이티(141.5%), 보톡스 제작사 휴젤(71.5%) 등이 자사주 매입 공시 이후 주가가 뛰었다. 하지만 주가가 오른 기업보다 하락한 기업이 더 많았다. 실적 악화 등으로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평가받은 기업은 자사주 매입 공시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 장비업체 HPSP가 올 들어 코스닥시장 최대 규모인 500억원의 자사주 매입을 발표하고도 7일부터 9일까지 1%밖에 오르지 않은 게 대표적이다.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경기 침체 우려 속에선 오히려 자본을 아끼는 기업의 매력이 돋보일 수 있다”며 “정부의 기대만큼 코스닥시장 상장 기업들이 밸류업에 동참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분석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