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고양이 한 마리가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기지개를 켜고 있다. 10일(현지시간) 오전 영국 런던 북서부의 한 버려진 광고판에서 발견된 뱅크시의 신작이다. '얼굴 없는 예술가'로도 알려진 그는 이번 주 들어 매일 한편의 '런던 동물 벽화 연작'을 도시 곳곳에서 깜짝 공개하고 있다. 이번 고양이 그림은 그중 여섯번째 작품이다.
그런데 해당 작품은 몇시간 뒤 작가와 계약한 업체에 의해 철거됐다.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지난 8일 뱅크시가 런던 남부의 페컴 라이 레인 건물 위 위성안테나에 남긴 네 번째 그림이 공개 한시간여만에 도난당했다. 달을 향해 울부짖는 늑대를 그린 작품이었는데, 복면을 쓴 범인 3인조가 이를 뜯어내 달아나는 모습이 한 시민에 의해 포착됐다.
뱅크시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세계적인 그라피티 아티스트다. 신랄한 풍자로 미술계에 일침을 날리면서 '예술계의 테러리스트'로도 통한다. 2018년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벌어진 사건이 단적인 예다. 그의 작품 '풍선을 든 소녀'가 약 17억원에 낙찰되는 순간 액자에 심어둔 분쇄기를 가동해 그림을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는 최근 6일간 런던에서 매일 한편의 동물 벽화를 공개하고, 작품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리면서 본인 작품임을 인증했다. 시작은 5일 런던 남서부 큐 브릿지 인근 건물의 염소 그림이었다. 절벽에 위태롭게 서 있는 염소의 형상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상징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일각에선 염소(goat)와 영문 철자가 같은 '고트'(Greatest of all time·역대 최고)로서 작가의 자신감을 나타낸 장치라고도 풀이했다.
이어 6일에는 런던 서부 풀럼의 한 건물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코끼리 두 마리를 그렸다. 7일의 주인공은 런던 동부 다리에 걸터앉은 원숭이 세 마리였다. 다음날 그린 늑대 그림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9일에는 런던 북부의 피시앤칩스 식당 벽면에 펠리컨 두 마리를 그렸는데, 뱅크시는 해당 가게 주인한테 그림의 소유권을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런던 동물원 연작'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정치적 풍자로 보는 시각이 대다수다. 최근 영국에서 벌어지는 반(反)무슬림 극우 시위를 '동물 무리'에 빗댄 것이라는 분석이 그중 하나다. 첫 작품으로 등장한 염소가 서남아시아에 널리 분포하는 가축이란 점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겨냥한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됐다.
작가가 직접 세운 보증 회사인 페스트컨트롤 측은 "최근의 작품들은 그림자가 빛을 가리는 시대에 대중을 응원하기 위한 차원에서 마련됐다"며 지나친 확대해석을 일축했다. 행인들한테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놀이'로서 기획한 퍼포먼스라는 얘기다.
영국 가디언 등 외신은 뱅크시의 일곱번의 런던 벽화도 가까운 시일 내에 발견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뱅크시 측 대변인은 "런던 시민들은 향후 며칠간 눈을 떼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