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알게 된 나이, 시간을 거스르다…발레리나 김지영

입력 2024-08-08 17:04
수정 2024-08-09 02:22

발레는 젊음의 예술이라고 불린다. “춤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되면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무용수의 전성기는 짧다.

한국이 낳은 최고의 프리마돈나 김지영(46)은 그런 세상의 말과는 동떨어진 인물이다. 1997년부터 2019년까지 수석무용수로 살았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서건 한국 국립발레단에서건 수석이었다. 심지어 발레단을 떠났는데도 여전히 무대 러브콜을 받는 1순위 무용수다. 과거의 전설이 아닌, 아직도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현재진행형 발레리나다. 2019년 퇴단 이후 5년간 훨씬 더 많은 무대에 섰다. 경희대 무용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병행하고 있다.

그는 지난 3일과 4일 일본 도쿄 신도쿄극장에서 열린 ‘발레 아스테라스 2024’에 참가하고 돌아왔다. 이 공연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무용수 등이 특별 게스트로 나섰는데, 최근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입단 시험을 통과한 스무 살 발레리노 전민철도 그중 한 명이었다.

“전민철과 2인무를 준비하던 발레리나가 부상을 입었다며 저에게 대타 연락이 왔고, 정말 얼떨결에 무대에 서게 됐어요.”

그에게 긴급 연락을 한 사람은 김지영 발레리나와 함께 한국 발레의 르네상스기를 꽃피웠던 김용걸 한예종 무용원 교수. 둘은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정도로 절친한 데다 국립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서 수없이 파트너로 춤췄다.

“일본에서 전민철 씨와 김용걸의 ‘산책’이란 작품을 함께했어요. 쇼팽의 선율에 맞춘 2인무 작품인데 ‘용걸이 오빠’가 안무가로서 인정받은 대표작이죠.” 김용걸 교수는 그를 섭외하며 “연륜이 있는 무용수와 젊은 무용수가 파드되를 하면 더욱 훌륭한 시너지가 나겠다”며 그를 설득했다고. 김지영과 전민철은 오는 28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또 한번 ‘산책’으로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발레리나 김지영은 은퇴 후 1년이 지난 2020년에 “무대를 완전히 끊어볼까”라고 생각했다. 코로나19로 공연 기회도 줄고, 가르치기만 하는 삶은 어떨까 궁금했다. 하지만 초대가 끊이지 않았다. “재능이 아깝다. 출 수 있을 때까지 보여줘라”는 주변 사람들에게 설득당해서다.

“매년 이제 그만 해야지, 그만 해야지 생각은 하는데 결국은 무대에 나가게 돼요. 그리고 또 무대에 서면 살아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요. 어느새 제가 손유희(올해 초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은퇴한 수석무용수)에게 너도 계속 춤을 추라고 했어요.” 손유희는 4월 M발레단의 ‘돈키호테’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발레단 소속 프로 무용수일 때와 프리랜서인 지금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는 “순도 100%로 즐길 수 있다는 게 프리랜서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프로 무용수일 때는 무대가 엄격한 곳으로 느껴졌어요. 숨을 곳도 없고 여러 가지 압박도 많았죠. 상대적으로 즐길 수 있는 여력이 부족했어요. 이제 자유롭게 춤을 추다 보니 왜 나는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할까, 춤의 본질은 무엇일까에 대해 더 잘 와닿아요.”

김지영은 11월 서울시발레단에서 선보일 컨템퍼러리 작품 ‘캄머 발레’에도 참여한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 있던 시절(2002~2009년)에 경험한 작품이어서 그의 감회는 더 새로워 보였다.

“안무가 한스 판 마넨의 작품인데 아시아 초연입니다. 3월 서울시발레단 일을 도와주던 무용계 인사가 이 작품을 공연할 거라고 하길래,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줄게’라고 한 걸 계기로 공연하게 됐어요. 무용수로서 돕겠다는 게 아니었는데 또 무대에 서네요.(웃음)”

17년 전 캄머 발레에서 그가 배웠던 건 춤을 추는 느낌이었다. “안무가가 저의 연습 장면을 보고 ‘순서만 외워서는 안 돼!’라며 연습실에서 나가버렸어요. 그때 부예술감독이던 분이 저를 잡고 음악을 동작에 녹이는 방법이라든지, 강한 내면을 춤으로 끌어내는 방식 같은 걸 알려줬어요.”

캄머 발레는 스토리가 없는 30여 분의 짧은 작품이다. 다만 여덟 명의 무용수들이 나와 2인무를 추는데 수많은 인간 관계를 춤으로 표현한다. “조지 발란신이 말했는데요. 저도 발레에는 구체적인 스토리가 꼭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2인무면 그 두 무용수가 몸으로 표현해내는 관계에 집중하면 되고 거기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거죠.”

2024년 지금의 김지영에게 발레란 어떤 의미일까.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를 살게 만드는 것. 무대에서가 아니더라도 저는 어디서든 발레를 하고 있을 거예요.”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