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이 아까 여기에 다녀갔어? 어쩐지 유황 구린내가 나더라니. 그 녀석은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야.”
프랑스를 대표하는 ‘국가대표 천재 화가’가 사람들 앞에서 막말을 내뱉자,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습니다. 화가의 라이벌이 몇 시간 전 이곳 루브르 박물관에 다녀갔다는 소식을 들은 후 나온 말이었습니다. 화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으로 다가가며 말했습니다. “창문 좀 열어야겠다. 더러운 냄새를 빼야지.”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또 시작이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화가와 그의 라이벌.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않고 밥만 먹는 두 사람 때문에, 다른 참석자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가 나오면서 모두가 ‘그래도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는구나’ 생각하던 그때. 성질을 참지 못한 화가가 결국 라이벌에게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이봐요! 선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건 말이에요. 정직한 겁니다! 명예로운 거라고요!” 자기 성질을 못 이긴 화가는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자기 옷에 커피까지 엎질렀습니다. “정직하고 명예로운 거다, 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또다시 생각했습니다. ‘아, 또 왜 저래….’
그 성질 더러운 화가의 이름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 라이벌의 이름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 프랑스 미술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이렇듯 보는 사람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과열돼 있었습니다. 당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거장이었던 두 사람 사이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왜 둘은 이렇게 싸우게 된 걸까요. 선의 대가, 앵그르미술 역사에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싸움이 있습니다. 뭘 놓고 싸우는지를 단순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현실을 차가운 이성과 정확한 선<i>(線)</i>으로 그릴 것인가, 아니면 마음속에 있는 주관적인 상상을 뜨거운 감성과 화려한 색(色)으로 표현할 것인가. 둘 중 어느 쪽이 더 훌륭한 예술인가.
‘무슨 그런 쓸데없는 이유로 싸우냐’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저 두 가지가 잘 결합된 작품이 가장 훌륭하겠지요. 하지만 ‘누가 더 센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건 인류의 DNA에 각인된 본능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 장군, 정치인, 축구선수, 야구선수, 가수, 아이돌은 누구인가.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지, 몇 살을 먹든지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몰입해 치열한 토론을 벌이는 걸 즐겨 왔으니까요.
특히 프랑스 예술에서 선과 색의 싸움은 교양인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인기 있는 대화 주제이자 논쟁거리였습니다. 18세기 초반 한 프랑스 예술이론가(로제 드 필)는 차가운 이성보다 뜨거운 감성이 더 중요한 가치라는 걸 주장하기 위해 재미있는 방식을 생각해 내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인 화가들의 그림에 점수를 매긴 다음 순서대로 줄을 세운 거지요. 마치 요즘의 게임을 하듯 화가의 ‘능력치’를 매긴 겁니다. 그는 구성, 드로잉, 색채, 표현의 4가지로 나눈 뒤 점수를 매겼습니다. 정확한 묘사보다 감동적인 색채를 중시했던 그가 공동 1등으로 꼽은 화가는 라파엘로(65점)와 루벤스(65). 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는 고작 49점을 줬지요.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싸움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앵그르는 정확한 선을 사용해 정밀하게 대상을 묘사하는 화가. 반면 들라크루아는 색채를 사용해 뜨거운 열정을 전달하는 화가였습니다. 말하자면 둘의 싸움은, 앵그르가 그리는 선과 들라크루아가 칠하는 색의 싸움이었습니다.
선을 대표하는 화가 앵그르는 예술 천재였습니다. 1780년 태어난 그는 작곡가이자 조각가였던 아버지에게서 미술과 음악의 재능을 모두 물려받았습니다. 어린 시절 앵그르가 보여준 바이올린의 재능은 음악가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정도였고, 화가가 된 후에도 자주 취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고 합니다. 그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지금도 서양에서는 ‘앵그르의 바이올린’이라는 표현이 ‘뛰어난 실력의 취미’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 바이올린보다 더 뛰어났던 게 미술 실력이었습니다. 덕분에 앵그르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습니다. 당대 최고 거장(자크 루이 다비드)의 제자로 들어갔고, 제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학생으로 꼽히며 예쁨받았지요. 스승인 다비드의 미술은 당시 미술계에서 ‘정답’으로 통했습니다. 작품의 훌륭함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비드의 화풍(신고전주의 화풍)을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했는가’일 정도였으니까요. 스승의 화풍을 흡수해 그대로 그림을 그리는 건, 미술 천재인 앵그르에게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20대에 당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미술상인 ‘로마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앵그르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스승의 가르침대로만 그린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나만의 화풍을 만들겠어.’ 그리고 앵그르는, 스승이 추구하는 ‘그리스·로마풍의 정석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더해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각종 상징을 총동원해 나폴레옹의 권위와 위엄을 표현한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연출하기 위해 여성의 허리를 실제 신체 구조보다 더 길게 표현한 ‘그랑 오달리스크’가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스승인 다비드는 이런 앵그르의 작품에 대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먼. 나한테 잘 배웠고, 실력도 훌륭한데, 왜 굳이 이런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거야?” 다비드의 눈치를 본 평론가들도 앵그르의 작품에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앵그르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부하고, 연습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그림을 계속 그리면서 완성도를 높여 나갔습니다. 그 노력의 결정체가 바로 마흔네 살 때 그린 ‘루이 13세의 서약’. 그의 작품을 비판하던 평론가들도 이 그림이 훌륭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평생 프랑스 미술계의 왕으로 군림해 온 다비드도 노쇠해 죽음을 앞둔 상황. 다비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평론가들은 앵그르의 작품을 아낌없이 칭찬했습니다. 덕분에 앵그르는 프랑스 국립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이 됐고, 훈장도 받았습니다. 새로운 ‘프랑스 미술의 제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색의 대가, 들라크루아앵그르가 온갖 찬사를 받던 그 때 충격적인 작품을 발표해 프랑스 미술계와 언론의 비판을 받던 젊은 화가가 있었습니다. 앵그르보다 열여덟 살 어린 20대 중반의 젊은 화가, 들라크루아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1780년생 앵그르가 걸어온 길과 1798년생 들라크루아의 삶에 공통점이 꽤 많다는 겁니다. 먼저 뛰어난 예술적 재능. 들라크루아도 앵그르처럼 다재다능한 사람이었고 특히 미술에서 천재성을 발휘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모두 떠나보내는 등 순탄치 않은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18살 때 엘리트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천재성 덕분이었습니다. 노력파라는 점도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공통점은, 들라크루아도 비판을 견디며 기존 유행을 벗어난 ‘나만의 화풍’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1824년 발표한 ‘키오스 대학살’이 그랬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 키오스섬 주민들을 학살한 비극을 그린 이 그림은 “붓놀림이 너무 거칠다. 추악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붓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표면을 자랑하는 다른 그림들에 비해, 비극을 강조하는 들라크루아의 거친 붓질은 마치 작품을 그리다 만 것 같은 인상을 줬습니다. 어떤 평론가는 그림의 제목에 빗대 “회화를 학살해버린 그림”이라고 비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젊은 날의 앵그르처럼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며 작품의 수준을 높여 갔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걸 찾고, 유행은 변하고, 생소한 것도 자꾸 보면 익숙해지는 법. 점차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들라크루아의 팬층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 한 비평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새로운 화풍(낭만주의 화풍)을 추구하는 대표 화가다. 앵그르가 고전적 천재라면 들라크루아는 새로운 형태의 천재다. 앵그르는 생동감과 색채보다 선과 명확한 형태를 중시한다. 반면 들라크루아는 극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눈부신 색채를 강조하기 위해 자세한 표현을 일부러 삼간다.”
이런 평론에 대해 앵그르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나중에 한 말과 행동으로 미뤄봤을 때 아마도 이런 불만을 가졌을 겁니다. ‘그림 같지도 않은 그림을 그리는 녀석을 감히 어디에 들이대는 거야? 급이 한참 떨어지는 새파랗게 젊은 놈을 나랑 비교하다니, 불쾌하군.’ 기존 미술계의 질서와 법칙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혁신을 끌어냈던 ‘젊은 혁명가’ 앵그르는, 어느새 기득권이 되어 새로운 ‘덜 다듬어진 화풍’을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보수파 미술계의 거물이 돼 있었습니다. 제자의 배신이때까지만 해도 앵그르는 들라크루아를 진심으로 미워하지는 않았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자신과 급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허접한 그림을 그리는 젊은 녀석’으로 무시하는 정도였지요. 하지만 이런 감정이 진심을 담은 증오로 바뀐 계기가 있었으니, 앵그르의 ‘수제자’가 자신의 화풍을 벗어나 들라크루아의 화풍을 따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 수제자의 이름은 테오도르 샤세리오(1819~1856)였습니다.
1819년 태어난 그는 불과 12살에 앵그르의 스튜디오에 제자로 들어갔고, 16살의 나이로 프랑스 최고 권위 전시인 살롱전에서 데뷔해 3등 메달을 받았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제자를 앵그르가 예뻐한 건 당연했습니다. 평소 칭찬에 인색한 앵그르가 이례적으로 사람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리 오세요, 여러분. 와서 보세요. 이 아이는 고전주의의 전통을 이어갈 천재입니다. 이 녀석이 미술계의 나폴레옹이 될 거라고요.”
하지만 앵그르는 몰랐습니다. 젊은 샤세리오의 마음이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화풍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요. 앵그르는 정확하게 그림을 그리는 걸 중시했고, 이런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학생들에게 같은 그림을 계속 반복해서 그리게 하는 등 기계적인 반복 훈련을 시켰습니다. 반면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화풍은 화가의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영감을 중시했고, 타오르는 것처럼 강렬한 색채를 썼습니다. 지겨운 반복 훈련을 받은 젊은 천재 샤세리오가 들라크루아의 자유로운 화풍에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도 이렇게 보면 당연합니다.
젊은 날의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처럼 천재였고, 노력파였으며, 야심이 컸고,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고 싶었던 샤세리오는 생각했습니다. ‘스승님의 정확한 선과 들라크루아의 뜨거운 색채를 결합한 작품을 만들겠어.’ 그래서 그는 스무살 무렵부터 풍부한 색채와 붓 터치를 작품에 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들라크루아에게 연락한다거나, 만나서 조언을 구한 건 아닙니다. 스승이 들라크루아를 좋아하지 않는 걸 잘 알았거든요. 그런데도 변화를 알아챈 앵그르는 격노했습니다.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너는 더 이상 내 제자가 아니다. 썩 꺼져!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똑똑히 들어. 다시는 나한테 그 녀석 얘기 하지 마!”
그 후 앵그르는 점차 들라크루아에게 공개적으로 적대감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잖아도 미술계에서는 ‘낭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녀석들이 슬금슬금 영역을 넓히고 있었습니다. 앵그르는 그들의 화풍을 ‘사이비 미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로잉을 제대로 하려면 25년이 걸리지만, 색을 칠하는 걸 배우는 건 한 시간이면 충분해. 그런 조잡한 건 미술도 아니야.” 앵그르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앵그르가 낭만주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교수 임용과 작품 수주 등을 적극적으로 방해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그게 사이비 미술의 유행에서 정통 미술을 지키는 ‘정의’라고, 앵그르는 생각했으니까요. 그에게 들라크루아는 그 사이비 미술을 이끄는 악마였습니다. 들라크루아가 다녀간 전시장에서 앵그르가 “고약한 냄새가 난다”며 창문을 열었던 것도, 식사 자리에서 들라크루아를 질책했던 이런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신이 난 미술계는 둘의 싸움을 적극적으로 부추겼습니다. 1849년 4월 28일 한 신문에 실린 만평은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이 만평에서 왼쪽의 들라크루아는 붓을, 오른쪽의 앵그르는 연필을 들고 서로에게 목숨을 건 공격을 시도합니다. 아래에는 이런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선을 대표하는 앵그르와 색을 대표하는 들라크루아의 목숨을 건 대결. 만약 앵그르가 승리하면 색채는 모든 그림에서 사라질 것이고, 물감 주머니를 가진 사람은 법정 최고형(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만약 들라크루아가 이긴다면 선은 불법으로 규정되며, 다리에서 낚시하는 사람조차 낚시‘줄’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체포를 면치 못할 것이다.”
다만 이런 앵그르의 공격에 들라크루아는 공개적으로 반격하지 않았습니다. 열정적인 화풍과 달리 냉정한 성격이었던 그는 “천재적인 분들이 원래 좀 그렇죠 뭐” 하며 웃어넘기곤 했지요. 앵그르의 지위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반격한다 해도 승산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친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나 일기에 솔직한 마음을 적었습니다. “색에는 법칙이 있다. 반면 드로잉에는 정교한 원리가 없다.” “앵그르는 원근법도 모른다. 그의 그림은 우스꽝스럽고 공허하고 가식적이고 어색하다.” “앵그르를 따르는 젊은이들은 왜 그렇게 잘난 척 하는지 모르겠다. 앵그르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 같은데, 그러면 재능은 죽어버리고 만다.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젊은이들을 앵그르가 기술자로 전락시키고 있다.”
속마음이 어땠든 간에, 들라크루아는 오랫동안 노골적인 비난과 굴욕을 참아내며 성숙한 처세를 보여줬습니다. 그 덕분이었을까요. 세월이 흘러 마침내 들라크루아도 앵그르의 집중 견제를 뚫어내고 프랑스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하나로 인정받습니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앵그르와 함께 선정돼 공동 전시를 하게 된 겁니다. 이 전시로 들라크루아는 예술원 회원에 뽑히고, 앵그르와 함께 최고 명예 훈장을 받았습니다. 훈장을 받는 날 앵그르는 한탄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화가인 내가 저 악마 같은 놈이랑 같은 훈장을 받는다고? 오늘 나는 이 어리석고 잔인한 시대와 헤어지고 싶다.” 엇갈린 운명이후 앵그르와 들라크루아, 그리고 앵그르의 수제자였던 샤세리오의 운명은 묘하게 엇갈립니다.
①들라크루아의 경우 : 프랑스 미술계의 대표 거장이 된 그는 1863년 65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습니다. 그의 명성은 세상을 떠난 후 더 높아졌습니다. 자유분방했던 그의 색채는 여러 화가들에게 영감을 줬고, 인상주의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세잔은 들라크루아가 그림의 성인(聖人)이 되어 천국으로 올라가는 스케치를 그렸고, 르누아르는 가장 좋아하는 그림으로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꼽았습니다. 오늘날 그는 근대 미술의 선구자이자,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로 기억됩니다.
②앵그르의 경우 : 앵그르는 죽을 때까지 프랑스 미술계의 거물로 군림하다가 1867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라이벌이자 자신보다 18살 어렸던 들라크루아보다 4년 늦게 세상을 떠난 겁니다. 하지만 인생 후반기에 들어 그는 낭만주의의 물결이 미술계를 뒤덮는 걸 지켜봐야 했습니다. 4년 더 살았다면 ‘인상주의자’라는, 앵그르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녀석들이 나타나는 꼴도 봐야 했을 겁니다. 오늘날에도 앵그르는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마지막 거장으로 인정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홀로 등장할 때보다 라이벌인 들라크루아와 함께 언급될 때가 더 많습니다. 인지도도 들라크루아에게 못 미칩니다.
③샤세리오의 경우 : 루브르 박물관에 최연소로 작품이 걸린 천재였지만, 선과 색,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장점을 결합한다는 건 샤세리오조차 이룰 수 없는 너무 큰 꿈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샤세리오의 독창적인 작품’이라기보다는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어정쩡한 중간’이라고 평가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시인이자 미술 비평가였던 보들레르는 샤세리오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샤세리오는 스승(앵그르)에게 배우고 들라크루아에게서 기술을 훔쳐 둘을 결합하려 했지만, 그 결과물은 이도 저도 아니게 돼버렸다.” 조바심이 난 샤세리오는 무리를 해가며 작업량을 늘렸습니다. 그러다 1856년 불과 37세의 나이로 과로로 건강이 악화돼 세상을 떠났습니다. 앵그르도 들라크루아도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2000년대를 전후해 그를 재조명하려는 바람이 있었지만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고, 오늘날에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세 사람의 조건은 거의 비슷했습니다. 일단 재능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습니다.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려는 열정과 노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결말은 꽤나 달랐습니다. 샤세리오는 ‘잘 그렸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화가’가 됐고, 앵그르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가 됐으며, 들라크루아는 영원히 미술사에 남을 프랑스의 대표 화가가 됐습니다.
이런 차이를 만들어낸 결정적인 요인이 뭘까. 정답은 없겠지만, 고민하다가 세 사람의 태도에 생각이 닿았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앵그르가 걸어오는 싸움을 최대한 피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끝까지 밀고 나가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앵그르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앵그르는 나이가 든 후 라이벌을 견제하느라 들라크루아에 비해 작품에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샤세리오는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라는 거장들에 압도당했고, 이들을 지나치게 의식해 무리수를 두다가 조바심을 냈습니다. 그러다 자신의 재능을 완전히 꽃피우지 못하고 과로로 요절하고 말았지요.
결국 남을 덜 의식하고, 덜 미워하고, 내면에 집중해 ‘자신만의 것’을 더 치열하게 추구한 사람이 성공을 거뒀던 겁니다.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소중한 것들에 온전히 집중하는,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i>****오늘 기사는 Delacroix(Sebastien Allard and Come Fabre 지음), Ingres versus Delacroix(Andrew Carrington Shelton 작성, Art History 2000년 12월호), Delacroix(Gilles Neret 지음), Portraits by Ingres(Philip Conisbee 등 지음), Ingres(Karin H. Grimme 지음), Theodore Chasseriau: The Unknown Romantic(Stephane Guegan 지음),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