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기내식 라면의 민폐

입력 2024-08-02 17:31
수정 2024-08-03 00:34
20세기의 지성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에코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란 책에서 항공기 기내식에 한 장을 할애했다. 협소한 데다 흔들리는 공간에서 간편식 대신 포크와 나이프를 써야 하는 기내식을 내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추론했다. “승객으로 하여금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국인 승객들에게 이런 느낌을 주는 기내식에 아주 값싼 메뉴가 있다. 라면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너무나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인데도 항공기만 타면 작심하고 라면을 시키는 사람이 적지 않다. 3만5000피트(1만m) 상공에서 라면을 먹는다는 것이 호사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대한항공이 오는 15일부터 일반석에 컵라면 제공을 중단한다고 한다. 난기류가 급증하자 승객과 승무원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온난화 등의 영향으로 올해 난기류 발생 건수는 2019년 대비 5년 새 두 배 이상 늘었다. 얼마 전 싱가포르 항공기가 난기류를 만나 승객 1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다친 사고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뜨거운 라면을 옮기거나 먹고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는가.

항공기에서 라면은 위험 식품이자 혐오 식품이기도 하다. 그러잖아도 자극적인 라면 냄새는 밀폐된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의 신경을 더 건드린다. 샌드위치처럼 조용히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달리 라면은 먹을 때 ‘후루룩’ ‘쩝쩝’ 소리를 내게 돼 옆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고 수면을 방해한다.

이런 위험과 민폐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먹을 만큼 기내식 라면이 맛있을까. 고도가 높을수록 기압이 떨어져 물의 끓는점이 낮아지기 때문에 면이 덜 익어 밀가루 맛은 더 난다. 비행기 엔진 소음 탓에 맛 신호를 혀와 침샘에 전달하는 안면신경 둔화로 미각이 30% 떨어진 상태에서 더 맛없는 라면을 먹는 것이다. 대한항공은 비즈니스·퍼스트클래스석은 좌석이 넓어 위험이 덜하다며 그릇에 담아주는 라면 제공 서비스를 유지할 계획이다. 그러나 몇 해 전 손해배상 1억원의 라면 화상 사고는 비즈니스석에서 나왔다. 기내 라면 서비스 자체를 없애는 게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