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에 갇힌 추상화 벗어던진 '파리의 서예가'

입력 2024-07-31 18:33
수정 2024-08-01 01:07

하얀 벽 위에 걸린 그림들에선 형태라곤 찾아볼 수 없다. 진흙 범벅 같기도 하고, 짜다만 물감 같기도 하다. 회화의 주인은 프랑스 작가 조르주 마티유(1921~2012). 그는 1940년대 주류 예술이던 기하학적 추상화 대신 ‘형태 없는’ 추상화만 평생 그린 작가다. 김창열과 박서보 등 국내 거장들의 초기작에 큰 영향을 준 작가로도 평가받는다.

그가 선보인 비정형적 예술은 1940년대 후반 유럽 예술계에 큰 충격을 줬다. 그의 화법에서 가장 중요시 여겨지는 건 ‘자유’. 그가 선보인 ‘날것의 예술’은 훗날 형태를 거부한다는 뜻의 ‘앵포르멜’로 불리게 됐다. “얼룩이 묻은 것 같다”며 프랑스어로 얼룩을 뜻하는 ‘타시즘’이라고도 했다.

조르주 마티유가 한국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 강남구 페로탕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조르주 마티유: 1960-1970’을 통해서다. 예술가로서 전성기를 달린 1960·1970년대 작품들을 모았다.


마티유가 그림에 빠져든 것은 열여섯 살 때였다. 고갱 등 네덜란드 거장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단체전에서 큰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화가가 되기엔 너무 늦었다고 판단해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처음으로 붓을 잡은 것은 스물한 살이었지만 풍경화와 인물화를 그렸다. 그는 파리의 해운회사에서 홍보 담당자로 일하다가 추상화를 처음 접했다. 미국 출장길에서 잭슨 폴록의 작품을 보고는 자유로운 추상화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그는 프랑스 미술계의 냉랭한 반응 속에서도 “작가가 캔버스 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어야 진정한 추상화”라고 외쳤다.

1950년, 회화 작가 마티유의 첫 번째 개인전이 열렸다. 파리 르네 드 갤러리에서 자신이 줄곧 내세운 ‘비정형적 추상화’ 8점을 세상에 내보였다. 프랑스 유명 저술가 앙드레 말로는 “서양의 서예가가 나타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마티유는 동양화에 관심이 많았다. 1940년대부터 동양의 서예를 찾아보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그림과 서예가 유사한 맥락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작가의 빠른 움직임과 에너지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된다는 점이다. 마티유는 빠르고 폭발적으로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다작의 작가로 잘 알려졌다. 그는 개인전을 위해 한 도시에 머무는 한 달여간 무려 21점의 작품을 그려내기도 했다.

마티유는 1950년대에 퍼포먼스 예술에도 도전했다. 1957년 일본 도쿄와 오사카를 돌며 펼친 대규모 퍼포먼스는 예술계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번 전시장 한쪽 벽에는 당시의 퍼포먼스 현장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사진이 걸렸다. 1957년 오사카 다이마루 백화점 옥상에서 마티유가 선보인 대규모 퍼포먼스 장면이 담겼다.

오늘날 프랑스 국민들에게 마티유는 매우 친숙한 작가로 자리 잡았다. 2001년까지 쓰인 프랑스 화폐 프랑 속 그림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에어프랑스의 대표 로고, 프랑스 왕실 도자기 세브르에도 그림을 그려넣으며 프랑스 시민들의 일상 속 작가가 됐다.

전시장 2층에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인 ‘튜비즘’ 기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도 나왔다. 물감을 칠하거나 바르는 대신 튜브 그대로 캔버스 위에 짜서 작업한다고 해 튜비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시는 8월 24일까지.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