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의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비는 사납지 않다. 제 의무라는 듯 추적추적 꾸준히 내릴 뿐이다. 우기여서 눅눅한 실내에서 뭔가를 끼적이느라 끼니때를 건너뛰었다. 배는 출출한데 딱히 입맛이 없다. 1분마다 어린애 23명이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지옥에서 입맛 타령이라니! 문득 구운 가지 요리, 동파육, 장어덮밥, 두부탕수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젓고 만다. 한소끔 끓여 찬물에 헹군 국수를 매콤한 낙지볶음에 비벼 먹었으면 했으나 냉장고에 재료도 마땅치 않고 재료가 있다고 한들 번잡한 일이라 포기한다.
나이가 들면서 입맛도 변한다
이럴 때 열무김치 비빔밥을 떠올린 것은 기특한 일이다. 이것엔 보리밥이 제격이지만 잡곡이 섞인 흰밥을 써도 무난하다. 밥맛은 찬밥이라야 그 진미를 알 수 있지. 양푼에 찬밥을 넣고 열무김치와 애호박 젓국을 얹어 고추장에 버무린다. 그 위에 달걀프라이를 얹고 참기름 몇 방울 뿌린 비빔밥 한술을 넣고 씹으면 입안에 감칠맛이 맴돈다. 여기에 얼음 띄운 오이미역 냉국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잃어버린 입맛을 살려낸 열무김치 비빔밥은 평소보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 먹는다. 두어 술 떠먹으며, 이것은 여름의 맛이라고 감탄한다. 비빔밥 그릇을 씻은 듯 비우고 달콤한 즙이 많은 황도 반 개쯤을 삼키니 기분 좋은 포만감이 밀려온다.
나이가 들면 입맛도 나이 따라 변한다. 어린애의 입맛에서 어른 입맛으로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외할머니는 외지에서 부임해 온 초등학교 교사를 들여 하숙을 쳤다. 아침을 먹고 민화투를 치러 놀러 오는 교장 사모님의 권유로 시작한 일이다. 교사들의 아침상에만 달걀찜을 올리는데, 먹다 남은 건 내 몫이었다. 달걀찜의 녹는 듯 부드러운 식감은 어린 혀에도 황홀했다.
자란 곳이 내륙 한가운데라 어린 시절에는 해산물을 먹을 기회가 전무했다. 고작해야 소금간을 한 간고등어 살 몇 점이나 먹었을까. 청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생선 날것을 먹는 즐거움을 깨쳤다. 고추냉이를 듬뿍 찍은 회 한 점을 씹었다가 고추냉이의 톡 쏘는 매운맛에 혼난 기억이 선명하다. 목포나 통영, 제주도 같은 곳으로 여행을 가면 으레 통창으로 바다가 내다보이는 횟집에서 횟감을 두툼하게 썰어낸 회 몇 점을 초장에 찍어 입에 넣는데, 그 맛이 좋았다. 도다리와 민어, 우럭과 광어회가 입맛에 맞고, 다금바리도 좋지만 값이 비싸 자주 먹을 수 없는 게 흠이었다
청어구이와 복국에 관한에 관한 추억
서른 해도 더 지난 일이다. 출판사 사무실 근처에 청어구이집이 한 군데 있었다. 청어 한 마리를 통으로 구워 밥과 밑반찬을 곁들여 내는 일식집을 날마다 갔다. 청어는 잔가시가 많은 게 흠이지만 알이 꽉 찬 청어를 먹는 즐거움이 대단했다. 청어의 식감과 풍미가 꽤 만족스러웠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달큰한 무조림도 좋고, 식사 끝에 먹는 짜고 신맛이 강한 우메보시도 좋았다. 일본인의 소울푸드라는 우메보시는 소금에 절인 황매실 장아찌다. 그걸 알사탕처럼 굴려 먹을 때 입안의 생선 비린내를 헹궈내는 게 좋았다. 두 해 뒤 사무실을 이전하며 그 일식집과도 멀어졌다. 날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된 기분으로 청어구이를 먹던 시절이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음을 깨달으며 아련해지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 즐겨 먹은 게 맑은 복국이다. 미나리 한 움큼을 얹어 팔팔 끓인 뒤 국물에 식초 두어 방울을 넣어 먹는 복국은 상상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먼저 데친 미나리를 건져 양념간장에 찍어 먹으면 입안에 미나리 향이 퍼진다. 복어의 하얀 살점을 발라 먹는데, 복어 살은 쫄깃했다. 입 안에 넣고 씹는 맛이 꽤 괜찮았다. 복국의 담백한 국물은 남김없이 먹는다. 그 맛은 뭐랄까? 그건 바다의 맛이다. 복국집에 가면 반드시 복껍질무침 한 접시도 주문한다. 복어 살은 다 씹을 새도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미나리와 함께 무친 복 껍질은 까슬까슬한 식감에 천천히 씹어 넘기는 맛이 좋다
나란 존재는 내가 먹은 것의 총체
사람은 반드시 먹어야 산다. 먹는다는 것은 외부 물질을 제 안에 들여 분해하고 자양분을 흡수하고 남은 것은 배설하는 과정이다. 우리 신체는 투입, 분해, 흡수, 배설로 이루어진 시스템이다. 사람은 잡식성인데 오랜 세월에 걸쳐 미식 취향을 가진 종으로 진화한다. 돌아보면 나는 실로 다양한 것을 씹고 삼키며 살았다. 내 감각 기관에 비벼지며 만든 어떤 음식 기억은 나를 꿰뚫는 듯하다. 어렸을 때 먹은 애저편육, 비린내에 놀랐던 굴, 까끌까끌한 감촉이 유난했던 밀밥들이 뱀, 소의 생간, 자라나 사슴의 피, 개구리튀김들이 그렇다. 보리싹을 끊어 넣고 끓인 홍어앳국이나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찌르는 삭힌 홍어도 일부러 찾아 먹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별식을 먹을 기회를 걷어차고 나오는 법도 없다.
제 몸에 맞는 음식을 먹으라고 이르는 어른들의 말에 잘 따랐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다. 반찬 투정을 해본 기억이 없으니 맞는 말일 테다. 음식을 만든 이의 다정함을 헤아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다. 제철에 제 고장에서 수확한 재료를 써서 정성을 다해 조리한 음식이 가장 좋다. 음식이 건강과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믿는 논리를 비약하자면, 나란 존재는 내가 먹은 것의 총체일 테다. 사람은 누구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가 어떤 인간인가를 은연중 드러낸다. 당신은 누구와 무엇을 먹고 싶은가? 그걸 얘기해준다면 나는 당신 식성에 숨겨진 인격과 취향에 대해 몇 마디를 건넬 수가 있을 테다. 오늘 점심에 당신이 먹을 음식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