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법당국이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의 한반도 전문가인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을 '한국 정부 불법 대리' 등의 혐의로 기소한 것과 관련, 대통령실이 문재인 정부의 책임을 거론하자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이 강력 반발에 나섰다.
고민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19일 수미 테리 기소 과정에서 국가정보원 활동이 노출된 것은 '문재인 정부 시절 일어난 일'이라는 대통령실의 반응에 "대통령실이 한가롭게 전 정부 탓을 하는데, 정녕 윤석열 정부는 수미 테리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나"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022년 8월 윤석열 정권 출범 100일을 맞아 수미 테리는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에 '윤 대통령 외교 정책의 힘찬 출발'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고, 대통령실은 이를 영문 홈페이지에 대대적으로 브리핑했다"고 말했다.
그는 "브리핑에 의하면 수미 테리 연구원은 '윤 대통령은 주요 선거 공약 중 두 가지인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세계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일련의 외교 정책 업적을 조용히 쌓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전했다"며 "수미 테리는 칼럼으로 윤 대통령을 치켜세웠고, 대통령실은 그 내용을 대한민국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 전파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 최고위원은 또 지난해 11월 6일 외교부에서 개최한 탈북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 상영회에 나란히 앉은 박진 당시 외교부 장관과 수미 테리의 사진이 실린 외교부 보도자료도 공개했다. '비욘드 유토피아'는 수미 테리가 제작자로 나선 작품으로, 코로나19 직전 발생한 2건의 탈북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문재인 정부 시절 청와대 상황실장이었던 윤건영 민주당 의원도 "수미 테리 건에 대한 조사 시기는 1년 전으로 외교적으로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였다. CIA 도청 사건(등 더 센 카드가 있는데) 그동안 우리 외교 당국은 뭘 했냐"며 현 정부에 문제를 제기했다.
윤 의원은 이날 MBC 라디오 '시선집중'에 출연해 "사전에 물밑에서 충분히 조율하고 하는 부분들이었는데 너무너무 아쉽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한편 이번 기소 건은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라며 "미 FBI가 2023년 6월에 거주지를 수색하고 핸드폰을 압수 수색했다. 지금까지 1년 동안 보고만 있다가 올해 기소한 건 두 가지 측면을 노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윤 의원은 "올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세계 각국이 미국에 대한 다양한 정보전을 펼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견제를 위해 시범케이스로 보인다"며 "두 번째는 2023년 4월에 미 CIA가 용산 대통령실 등 주요 우방국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CIA로선 '우리도 뭔가를 쥐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일종의 맞불 성격의 정보전을 펼친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낸 박지원 의원도 전날 "대통령실이 나서서 문재인 국정원 감찰 문책 운운하면서 문제를 키우는 것은 국익에 하등 도움 되지 않는 하지하책"이라고 비판했다.
박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시각에도 각국의 정보기관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치열한 정보전을 하고 있다"며 "문재인의 국정원, 윤석열의 국정원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국정원을 갈라치기 해 정보역량을 훼손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만 우리 정보당국과 정부는 박근혜 정부 때인 10년 전 이미 미 연방수사국(FBI)이 수미 테리에게 경고한 활동을 왜 이 시점에 미 검찰이 기소한 것인지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며 "미국은 자국의 보안을 이렇게 철저하게 지키는데 우리는 대통령실을 도청당하고도 동맹이니까 문제가 없다고 퉁치고 넘어갔던 것도 이번 일을 계기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전날 오전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용산 대통령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국정원 요원이) 사진에 찍히고 한 게 다 문재인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당시 문재인 정부가 정권을 잡고 국정원에서 전문적 외부 활동을 할 수 있는 요원들을 다 쳐내고, 아마추어 같은 사람들로 채우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 뉴욕 남부지검은 지난 16일(현지시간) 수미 테리를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공개된 공소장에 따르면 수미 테리는 2013년부터 지난해 6월쯤까지 국정원 간부의 요청으로 전·현직 미 정부 관리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한국 정부의 대리인 역할을 했고, 그 대가로 명품 핸드백과 연구활동비 등을 받았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수사 결과, 테리 연구원은 이외에도 약 3만7000달러(약 5111만원)의 연구 지원금을 불법적으로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